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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침, 서로 사랑하라설교 2025. 5. 16. 23:26
새로운 지침,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1–35절 (표준새번역)
1.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
요즘 뉴스를 보면 마음이 참 복잡해집니다. 작년에 한 정치인을 향한 암살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붙잡혔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 신념이 다른 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놀랍습니다. 또한 요즘 한 교회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이름은 ‘사랑제일교회’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따뜻하고 다정한 공동체 같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참담합니다.
개신교 안에서는 “그 목사는 특이한 사람일 뿐”이라고 선을 긋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들인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곧 개신교의 민낯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향해, 냉소와 분노를 보냅니다.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긴 사랑이 제일이 아니라 돈이 제일인 것 같네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돈이라”이런 댓글들을 읽다보니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런 비판의 글들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는 갈등을 겪는 한 단체의 회원 한 사람의 강연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손으로 하트를 그리면서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 준비한 원고를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원고를 다 읽은 뒤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불과 십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이들이, 바로 얼굴을 바꿔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니, 사랑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 앞에서 저는 묻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시대에는 진정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 가운데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예수 공동체의 밤 – “유다가 나간 뒤에”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결정적인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그 지점에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는 자리를 마칠 즈음에 유다가 떡을 받은 후 조용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이전까지 예수공동체는 단단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가 떠남으로 인해서 공동체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를 성서는 “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왜 떠났을까요? 그는 단순한 탐욕 때문에 배신한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하게 된 것일까요? 성서는 이미 그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에 악마가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 넣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붓는 장면에서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가룟유다의 실망과 기대의 어긋남이 숨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좀 더 실용적으로, 좀 더 세상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과 헌신, 낭비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오히려 지지하셨습니다. 그것이 가룟유다에게는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가운데 제일 유명한 작품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유다는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빛에서 물러난 어둠의 경계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움추려 있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돈주머니를 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유다는 예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떠남 이후에 그가 붙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돈밖에 다른 어떤 것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길’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익숙한 방식으로 살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계, 그 손 안에 쥘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버리고 돈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단지 배신자의 초상이 아니라, 믿음에서 멀어진 인간이 무엇을 붙잡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신앙 안에서 겪는 내면의 균열, 확신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영혼의 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3. 매니퓰레이션 되는 신앙 – “확실한 답”
최근 10년간, 한국 사회는 이단 종파의 득세로 깊은 상처를 겪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 정문마다 이런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신천지는 출입을 금합니다.” 그 문장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출입을 금지해야 할 만큼 교회 안으로 스며든 거짓말들, 그리고 그 거짓말에 빠져든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신천지뿐만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 점성술, 무속 신앙, 그리고 무속과 손잡은 부패한 정치의 유착까지— 우리 사회는 지금 불안한 마음을 매니퓰레이션하는 기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어떻게 저런 걸 믿을 수 있지?” 그 질문은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저는 이 문제를 조금은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런 걸 믿을 수 있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은 저렇게 되었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내 인생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감각에 사로잡혔을 때, 사람은 무엇이든 붙잡고 싶어집니다. 그게 아무리 이상하고, 비논리적이고, 위험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누군가가 제시하는 명확한 해답, 쉽게 손에 잡히는 구조,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에 기대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진리여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덜 아프고 싶어서,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급하게 잡게 된 확신의 단어들이 그들의 삶을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저는 신천지와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 가운데서 ‘가룟유다’의 모습을 얼핏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또한 기성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를 하는 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을 믿는 믿음은 분명하게 살아내야 할 삶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하게 교리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도록 힘쓰는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삶이 단순해 보이지만,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가난을 택해야 하는 삶이며, 나의 것을 남과 나눠야 하고, 모든 이들을 수용하는 삶일텐데 그 삶이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똑 떨어지는 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교리로 대체되고, 생활 가운데 겸손한 고백이 아닌 ‘확신의 언어’로 소비되며, 사랑은 선택이 아닌 논쟁의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야 할 말씀 대신 딱 떨어지는 교리와 분명한 경계 속에서 안도하는 상황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히려 우리 신앙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지점이 되기도 합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떠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자기만의 ‘확신의 언어’에 이르렀다는 반증입니다. 그는 자신은 옳고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지 않자 그는 예수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확신은 자신을 옳다고 믿게 하고 타인을 틀렸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확신은 사랑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혐오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혐오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결국 그는 자신의 설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그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4. 예수의 새로운 지침 – 남아 있는 자들, 서로 사랑하라
유다가 나간 뒤, 예수께서는 조용히 입을 여셨습니다. 그 침묵의 밤, 공동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감도는 그 순간, 예수님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3:31–35)
예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사랑이었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질지도 모를 가장 불안한 순간에, 가장 ‘뻔하고 진부해 보일 수 있는 말’을 되풀이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말이,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살아야 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말씀이 바로 자신의 제자가 떠난 뒤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제자가 떠나고 이제 당신은 대제사장들의 손에 의해서 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하신 굳건한 다짐의 말처럼 보입니다. “나도 너희들은 끝까지 사랑할테니, 너희들도 서로를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진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서로를 돌보는 일, 뒤처진 이를 기다리는 일, 의심 많은 이를 품는 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안아주는 일은 너무도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다시 새롭게 들립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시작되었고, 이미 무너져버린 이 공동체를 다시 세워가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기억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지침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 혐오가 확신으로 포장되고, 신앙이 배제의 언어로 쓰이고, 사랑이라는 말이 거래처럼 소비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새로운 부르심처럼 들립니다. 사랑은 우리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교회만의 언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과 세계를 회복시키는 힘이며, 지금 우리가 붙들어야 할 살아 있는 계명입니다.
저는 때때로 숲을 걷습니다. 그 길 위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 잎이 지고, 그 잎이 땅에 스며들어 다시 다른 생명을 일으키는 순환을 보며— 사랑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자리로 내가 낮아질 수 있다면, 그곳에야말로 예수께서 남기신 사랑이 살아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끝까지 아름답게 전승될 것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 후 마감기도
사랑의 주님, 어둠이 찾아왔던 그 밤, 유다가 떠난 그 자리에 남은 제자들에게 당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너무 평범해서, 때로는 잊히고, 가볍게 들리기도 했지만— 오늘 우리는 그 말씀이 깊은 밤을 통과한 자들에게 남겨진 새로운 지침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가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확신의 언어보다, 고백의 침묵으로 타인의 자리를 이해하게 하소서. 세상이 혐오를 진리로 말하고, 거짓이 더 큰 목소리를 낼 때에도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서로를 품는 사람들로 남게 하소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돈이 제일이 되고, 권력이 제일이 되어버린 교회의 허상을 회개합니다.
주님, 당신의 길은 여전히 어렵고 좁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길을 함께 걷게 하시고, 버림받은 자들, 뒤처진 이들, 그리고 제자리에 머무는 우리 모두가 다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우리 각 사람 안에 당신의 사랑이 조용히 자라게 하시고, 누군가의 어두운 밤을 비추는 작은 불빛이 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사랑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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