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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포도나무교회 설교 /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설교 2025. 5. 19. 15:18

    설교 제목: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4:23–29 (표준새번역)

    1.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

    제가 어릴 적에 교회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습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풍성하게 주어도 교회가 부흥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먹을 것은 풍요롭지만 오히려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굶주린 사람에게 밥을 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다.” 요즘 저는 이 말이 참 깊이 와닿습니다.

    요즘 MZ세대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부장님들과 과장님들은 직원들에게 10분 먼저 오라고 말을 하는데 왜 계약서에도 없는 것을 강요하느냐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지만 자신들이 늦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는 이 문제는 비단 시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약서와 조항들만 있지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관계는 계약서는 있지만 서로 관계와 사랑은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계약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연대하는 삶인데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호의가 반복이 되면, 호의가 권리가 된다”는 말 말입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테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는 결국에는 권리만이 남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듭니다.

    저는 지난 주에 여러분들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지난 주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되었을까요? 저는 여러분의 응답이 궁금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제가 전한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이 바뀌어야 하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사실은 기만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말로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주고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사랑의 삶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고 삶 속에서 실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약속: “그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 하겠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갈 결심을 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그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제자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 말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요,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겠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사랑은 말하자면 사랑의 말을 간직한채 함께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3. 보혜사: 사랑을 기억나게 하시는 분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셨으니,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삶, 사랑 가운데 거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떠남’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랑의 공백’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좋아하던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은 헤어지고 난 뒤에 비로서 알게 되지만” 해바라기의 노래 ‘헤어진 후에’의 가사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떠나간 뒤에 비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있을 때 잘하면” 좋겠지만, 그게 잘 안되는 것이 또한 우리네 인생인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잘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게 된다면, 그 빈공간이 너무도 크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공간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 의해서 체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을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빈공간을 체울 사랑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보혜사 성령님의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가르침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상하는 것,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그 인자한 모습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들을 생각나게 하면서 그 말씀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시면서 우리의 삶이 사랑의 빈공간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만들어내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도와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4. 사랑, 먼저 내어준 손길과 먼저 도착한 시간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커피트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고립은둔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상처가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신들이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한가지 문제는 자신들이 다른 이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친구들을 돕기 위해서는 상처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보혜사성령께서 일상속에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커피트럭을 처음 시작했을 땐, 행사 시간이 1시면 1시에 맞춰 갔습니다. 시간을 맞췄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저를 부르신 원장님은 20분 먼저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커피차 행사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몹시 기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고, 저는 그날 행사를 겨우겨우 간신히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저는 어떤 행사이던지 1시간 먼저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원활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것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며, 먼저 그 자리에 도착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랑을 커피트럭에서 일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해야 할텐데 말하자면, 성령님은 그 이전에 먼저 온 생각과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먼저온 시간과 생각을 예수님은 평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란 타인을 위해서 먼저 내민 손길과 먼저 도착한 시간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될 때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도착해서 그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그곳에서 상대가 오기를 미리 기다려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렇게 미리 내민 손길과 먼저 도착한 시간이 바로 평화이면 보혜사 성령님이 만들어 가시는 사랑어린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공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보혜사 성령님의 사랑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5. 지양해야 할 사랑에 대한 환상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평화와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잘못된 환상들입니다. 이 환상들은 겉보기에 멀쩡한 말 속에, 때로는 우리가 위로처럼 내뱉는 일상어 속에 숨어 있습니다.

    “더 이상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 말은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사랑도 끝났다고 생각하는 환상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감정은 잠깐이지만, 사랑은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의지이며, 시간을 견디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이 말은 사랑을 ‘나와 맞는 사람 고르기’쯤으로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조건을 맞추는 일이 아니라, 다름을 견디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왜 저런 사람과 함께 사는 걸까?’ 싶은 이들을 통해 사랑이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수용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사랑은 결국, 다름을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니까 더 잘되게 해주고 싶은 거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래?”
    이 말들 속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바꾸려는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과도한 개입과 기대는 결국 사랑이 아니라 기억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해줬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준 줄도 잊어버릴 만큼 비워지는 행위입니다.

    “나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다 줄 수 있어요.”
    이 말은 마치 자기를 지워야만 사랑이 완성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관계를 위해 나 자신도 잘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자신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자녀들에게는 어떤 어른도 줄 수 없는 희망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진짜 사랑이 오겠지요?”
    이 말은 마치 어디선가 운명적인 사랑이 다가올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오다가 다른 누군가가 먼저 알아보고 데려갑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은 모두가 원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내 현재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랑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이 말은 초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절망이나, 아직 끝나지 않은 집착의 언어일 수 있습니다. 담담해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은 깊은 기대와 미련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을 그저 일상의 습관처럼 내뱉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참된 사랑과 평화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며, 사랑은 통제가 아니며,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6. 그래서 사랑은 더딘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사랑을 다시 말해야 합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랑은 아직 오지 않는 그 사람과 순간을 위해 견디는 시간들입니다. 또한 사랑은 억지로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사랑은 그 인고의 시간을 포함합니다. 또한 사랑은 누군가가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집을 사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집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더 귀한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사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또한 사랑은 반복이고 훈련이고 선택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또 어떤 일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훈련을 받으며 또 그 삶을 자의적으로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손해보는 마음을 품는 일이며 사랑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기에 충분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배반할 때도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견디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두 그 사랑안에 거하는 이들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말한 모든 사랑은 제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교회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에 기대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랑이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 안에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이 설 곳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아갈 삶의 거소를 만들어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후 마감 기도문]

    사랑의 주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사랑은 자주 식고,
    감정에 기대거나 기대에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감정이 아닌 결단으로,
    기대가 아닌 동행으로,
    사랑 안에 거하기로 다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샘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평화의 공간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먼저 도착한 자의 여유로,
    손해 보는 자의 믿음으로,
    끝까지 기다리는 자의 온유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
    우리를 사랑의 거처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말씀하신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며
    우리를 사랑의 공간으로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계약이 아닌 관계로,
    조건이 아닌 존재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이의 삶에,
    그 손길과 시간과 기다림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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