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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개의 언덕을 넘는 여인들-그들의 눈물과 부활의 기쁨 /25년 부활절 설교
    설교 2025. 4. 20. 11:00

    네 개의 언덕을 넘는 여인들 – 그들의 눈물과 부활의 기쁨
    요한복음 20:11–18 (표준새번역)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힘으로 다시금 소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네 개의 언덕 위에서 울고 있는 여인들’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언덕 위에 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오늘 이 부활절이 기억과 기념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일 먼저, 미아리고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릴 적 미아리고개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매일 버스를 타고 오가다 보면,‘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미아리고개에는 전쟁 이후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매일같이 그 고개를 올라 하염없이 자녀를 기다렸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믿으며, 오지 않는 아들의 이름을 가슴 속에 삼키며 고개 위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 여인들의 슬픔을 담은 노래의 제목은 ‘단장의 미아리고개’ 였습니다.

    여기서 ‘단장’이란 ‘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말합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과 애절함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슬퍼하실 때 쓰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 역시 창자가 끊어질 듯한, 몸으로 느끼는 깊은 슬픔과 연민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두 번째 언덕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두 번째로 함께 오를 언덕은,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었던 그 무덤 앞 언덕입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예수를 잃었습니다. 그녀는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 위에서 홀로 숨을 거두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숨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그 자리에 붙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갈 곳이 아무곳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숨을 곳이라 있고, 또 숨겨줄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리아에게는 숨을 곳도 없었고 갈곳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진 이후로 그녀가 있을 곳은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요 20:11) 그녀는 예수를 보았으나,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부분에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상실로 인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는 부활하여 그의 곁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울고만 있습니다. 슬픔은 그녀의 시선을 가렸고, 상실은 그녀의 인식을 막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깊은 상실의 순간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곁에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 속을 지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순간들을 트라우마라고 말합니다. 트라우마는 존재를 가리고, 감각을 흐리고, 세상을 낯설게 만듭니다.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삶 전체의 중심을 잃어버린 채 멈춘 시간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자신을 휘감고 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녀의 삶을 일순간에 바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부름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단절된 존재를 다시 부르는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때서야,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봅니다.

    “마리아야.”

    이 단 한 마디. 그 부름이, 그녀를 다시 깨우고, 다시 존재하게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보니!” 이 뜻은 “나의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신앙은 눈으로 보아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불릴 때 비로소 깨닫는 관계입니다. 그녀는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반가운 마음에 예수를 붙잡으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고,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리고 그녀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알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박해를 피해서 숨고 흩어지던 공동체는 다시금 부활공동체로 새로운 파송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머무름이 아니라, 파송입니다. 사랑을 잃은 자에게 주어진 첫 사명은 다시 걸어 나가라는 부활의 명령이었습니다.

    세번째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오르고자 하는 언덕은 바로 이태원과 세월호의 언덕입니다2022년 가을 어느 토요일 저는 익산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피곤한 몸으로 일산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상한 속보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전해왔습니다. “이태원에서 공기부족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속보들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우리에게 들려온 소식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 밤에 이태원고개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서울 이태원에서 수많은 젊은 생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 이후, 어떤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골목을 찾아가 조용히 꽃을 놓고 속삭입니다. “우리 딸, 오늘은 잠깐 나왔니?” 그분에게 세상은 멈췄고,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현수막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현수막 내용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불렀을 그 이름, 엄마” 그 말은 단 한 문장이었지만, 세상의 어떤 시보다 더 슬프고, 더 절절하게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를 불렀고, 엄마들은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곁에는 세월호의 노란 리본도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같은 고개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억은 끝나지 않았고, 고개는 아직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이 고개는 단지 죽은 자들의 고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매일같이 오르는 고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곁에 함께 있으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은 바로 이 시대에 부활을 증거해야 하는 교회여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첫번째 고개, 미아리고개의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의 곁을 한국교회가 지켰습니다. 그녀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녀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힘으로 그녀들은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한국교회는 부활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고개인 마리아의 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 힘으로 그녀는 자신을 누르고 있던 트라우마를 벗고 부활의 증인으로 우뚝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로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설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주님께서 불렀을 때 그녀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남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과 마리아가 서로를 바라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직면하게 된 사건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 대면은 바로 마리아를 새로운 삶, 곧 부활의 증인으로서 파송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타인의 얼굴’이란 개념을 자신의 철학적 화두로 삼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엠마누엘 레비나스인데 그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얼굴로 온다. 타자의 얼굴은, 나를 향한 부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타자의 얼굴을 거절하지 않는 것, 그것을 신을 환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와는 다른 타자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 그리고 그 얼굴에 맞는 나눔과 실천을 할 때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타자의 얼굴’ 앞에서 취해야 할 삶의 태도임을 말합니다. 

    저는 이제 마지막 언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 언덕은 오늘 우리가 예배당을 나가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백석동 언덕입니다. 이 언덕에는 수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상처를 직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성령님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 이름에 적합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두 홀로 남겨져 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저는 ‘더불어섬센터’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리딩커피바’의 문을 닫아두었는데, 갑자기 그 앞을 서성이는 한 모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어떻게 오셨나요?”라고 말을 하니, 그분은 “일부러 찾아왔는데, 오늘 안하시나요?” 그래서 저는 급하게 문을 열고 주문을 받았습니다. 스페셜티커피와 자녀를 위해서는 크림치즈와플을 시키셨는데, 얼핏보니 자녀가 몸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저는 순간 그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몸이 불편한 자녀와 함께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브리딩 커피바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브리딩 커피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리아가 울었던 그 무덤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백석동 13블럭이 바로 네번째의 언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또 고백하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의 얼굴을 마주봐주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활의 증인으로 바라보라고 파송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부활의 증인들도 서로를 호명해 주고, 서로를 바라봐주어야 할 것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말합니다. “I see you.” 그 말은, “나는 너를 존재로서 본다. 너의 고통을 보고, 마음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경험한 우리들도 이제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의 사랑을 나누게 되는 2025년의 부활절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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