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유, 그리고 그 방 가득 찼던 것설교 2025. 4. 6. 00:22
“향유, 그리고 그 방 가득 찼던 것”
요한복음 12:1–8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가 이 아침, 여러분의 삶에 조용히 내려앉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삶 속에서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누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 이야기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자리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시작과 더불어 예수님의 표적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등이 나오며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놀라운 능력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서 그분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다른 말로 하자면, ‘표적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의 전장인 11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내심으로써, 생명의 주님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동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긴장감 속에서 12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 십자가를 향한 길목에 위치한 이야기입니다.
그 마지막 여정에 예수님은 다시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으니 여간 기쁘고 감사한 자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만남 자체로도 큰 울림이 되어 서로를 전율케 하였을 것입니다. 말이 필요가 없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분주한 잔치 가운데 한 여인의 조용한 행동이 방 안의 공기를 바꿉니다. 그것은 소리 없이 부어진 사랑의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그 집에 가득찼습니다. 값으로 치자면 삼백데나리온이나 나갑니다.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귀한 향유입니다.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설교자들은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순간에 어떤 시간에는 우리의 그런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은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건 가운데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에 주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았고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는 마음 속 깊숙이 일어나는 감정을 따라서, 일어서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향유 한 병을 들고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감사와 사랑을 몸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어떤 설명보다 컸으며 그녀의 헌신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예배였습니다.
유다, 냄새를 견디지 못한 사람
그러나 우리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반응한 한 사람의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리아처럼 감동하고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차마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되는 순간에 가룟 유다의 입에서 한 마디의 외침이 나왔습니다. 그 외침이 그 거룩한 순간의 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일순간 모든 이들이 술렁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왜 이걸 이렇게 낭비합니까?”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말은 그럴싸했습니다. 논리도 완벽해 보였습니다. 정의감으로 넘치는 그럴듯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이 한 마디로 그의 말을 평가합니다. “그는 도둑이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복음서 기자는 그를 도둑이었다고 평가를 했을까요? 일면, 그의 말은 정당해 보였습니다. 합리적인 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사랑이 없었고, 울림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도, 예수님에 대한 경외도 없었습니다. 만일 있었다면 그것은 계산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 앞에서 효율을 따졌고, 예배의 자리를 실용적 판단의 장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왜 그는 마리아를 폄하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유다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는 굳이 나서서 마리아를 폄하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단순하게 도둑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탐욕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그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헌신 앞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말하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마음이 툭하고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왜 툭하고 튀어나왔을까요?
그건 자신이 처하고 있는 시스템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서있는 자리와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난 것이고 그 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효율 중심적 사고가 무너지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서, 사랑이 없는 이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사랑이 많은 사람, 사랑에 빠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은 자신이 사랑이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들킨 것입니다. 그것을 가룟유다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그의 열등감이 발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한 헌신을 낭비라고 말하며, 그녀를 폄하하는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장면은 반복됩니다. 예수님 앞에 드려지는 진심 어린 사랑과 헌신이 때로는 세상의 기준에서 낭비로 여겨지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최근, 우리는 세계 정치의 흐름 속에서도 유사한 태도를 목격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국제 질서를 협력과 상생보다는 관세와 숫자로 서열화하고 정리하려 했습니다. 그는 국가 간의 관계를 복잡한 인격과 역사의 축적이 아닌, 수치와 거래의 관점에서 판단했습니다. 어떤 국가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어떤 국가는 단지 비용과 효율의 문제로 치환되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명확했고, 어떤 면에서는 실용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사유 없이, 사랑 없이 행해진 결정들이었습니다. 이익 중심, 효율 중심의 세계관은 결국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이런 효율 중심의 세계에는 그 어떤 미래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을 마주하고도 효율을 따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수치와 효율로 따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판단으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사랑을 자신의 판단 가운데 단정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논리는 명확하고, 일견 실용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랑도 사유도 설자리가 없습니다. 관계는 계약이 되고, 사람은 숫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될 뿐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빠진 효율은 언제나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될 뿐입니다.
그를 그대로 두어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그대로 두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단순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시간을 끊고 자신의 시간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전략’을 간파하시고, “그를 그대로 두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로지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를 온전한 존재, 온전한 헌신, 온전한 순간으로 그 순간과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사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전술(tactic)'이라는 개념을 통해, 거대한 전략과 구조의 질서 속에서도 한 개인이 어떻게 은밀하게 저항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드 세르토에게 전술이란, 말보다 행위이고, 계획보다 감각이며, 권력보다 삶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며 감각이며 삶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리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발 앞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말보다 더 깊은 복음을 행위로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제도 밖에서, 경계선에서, 일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예배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잔치의 자리를 예배의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재회한 그 자리가 그녀에겐 천상의 예배처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전략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삶을 대중가요로 말하자면, “사랑 밖엔 난몰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유다는 사랑 없이 전략을 따졌습니다. 그는 구조와 체계 안에서 움직이되, 사유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진실을 가장 멀리한 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그는 예수와도 마리아와도 단절된 삶의 자리에 머물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끝내는 예수를 팔아버리는 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그대로 두어라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의 행동을 나의 평가로 제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전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같은 마음과 전술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로 가져 나와서 그분에게 드리고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 되길 바랍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가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 사랑
공지영 작가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사형수 윤수와 전직 피아니스트 유정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윤수는 어린 시절부터 상처와 외로움 속에 살아오다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되었고, 유정은 삶에 깊은 무기력과 절망을 안고 교도소를 방문하게 됩니다. 둘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나눕니다. 상처 가운데 어느 누구도 수용할 수 없었던 이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앉아서 그 조용한 시간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차립니다. 그 순간 윤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살고 싶다는 말, 살아야 할 이유...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저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살고 싶어지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사람과 사랑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것이 우리의 삶을 완전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이 어쩌면 염화가섭과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서 구하셔서 부활케 하신 그 분의 알현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그 사랑을 드러내고 싶었던 그 여인과 그 사랑과 헌신을 알아차린 예수님의 그 만남과 재회의 순간이 바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야 할, 그리고 지향해야 할 삶의 순간임을 복음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중직 목사로서 모든 삶을 다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성교회 목사들이 월요일에는 쉼을 가지지만 저는 단 하루의 쉼도 없이 매일 매일 노동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성직을 감당해야 하고, 법인회사의 대표로서 회사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모든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제 모든 시간은 주님을 위해서 바쳐진 마리아의 향유와 같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연약해 지고 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갈수록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의 촛불로써 제 삶을 다 드릴 수 있다면 그것에 감격하고 기뻐하며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의 삶이 지루하고 기쁨이 없고 따분하다면 그것은 아직 여러분의 삶을 다해서 사랑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때로는 가룟유다와 같은 길로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리아의 전략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정과 마리아의 헌신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거룩한 향유로 드려지는 삶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귀 위에 계신 하나님 (0) 2025.04.13 예수메시지 10 '차별하지 말고 사랑하라!' (0) 2025.03.09 예수메시지2 세례와 회개 (0) 2025.01.12 예수메시지 1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1) 2025.01.05 2024년 송구영신 예배 설교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 60:1~3) (1) 202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