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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의 예수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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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귀 위에 계신 하나님
    설교 2025. 4. 13. 02:07

    📖 설교 제목: 나귀 위에 계신 하나님

    본문: 누가복음 19:2840 (표준새번역)

     

    인사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골로새서 2:9-10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그 모든 충만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충만함이란 부족함이 없이 완벽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대한 인식일 것입니다. 그 풍성함을 누리는 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의 풍요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일 것입니다.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을 보면 기대로 가득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편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근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피곤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기대를 했던 것은 바로 메시야의 도래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줄 어떤 존재를 기다렸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을 때, 모두 나와서 반기며 환호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비로소 예루살렘을 점령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점령당한 상태였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기대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그 이후에 로마군인을 축출하고 예수께서 이스라엘에게 독립을 선포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란 신앙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나귀를 택하신 예수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품었던 기대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멋진 왕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입장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입성하셨다면 그것은 곧 로마와의 한판 전투가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히 택하는 선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택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챗GPT에게 물어봤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대표님, 말하자면 요즘으로 치자면, 예수님께서 포르세를 탄 것이 아니라, 경운기를 타신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해서 제가 그 글을 읽고 한참동안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딱 맞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더 멋지게 보이게 하려고 자신의 형편에도 맞지 않는 고가의 차량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카푸어들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우스푸어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 차량이나 집이나 모두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차를 짊어지고 다니고,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예수님께서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신 것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신 이유에 대해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도보로 가시지 않고 꼭 나귀를 타셔야 했을까요? 여러분들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놀라운 뜻이 숨어 있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텐데요, 먼저 첫 번째로 주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택하셨습니다. “보아라, 네 왕이 오신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스가랴 9:9) 두 번째로 당시의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는 말을 탔지만, 평화를 전하러 갈 때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를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선택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방식인 자기 계시의 수단으로 나귀가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 입성은 십자가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걸어서 들어가셨더라면 그것은 그저 여행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여행자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입성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은 당신은 왕이시지만, 이 땅에서의 왕권을 거절하신 선언입니다. 당신께서 힘이 있지만, 그 힘으로 세상을 뒤엎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신 까닭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나귀가 바로 섬김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낮은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신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더디고, 연약하고 유약한 존재입니다. 빠르고 급하게 바뀌어 가는 세상의 흐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바로 나귀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펼쳐가시겠다는 분명한 선언인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 길은 넓은 길일 것입니다. 좁고 비좁은 길을 가기에는 말이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은 좁고 험한 길이셨습니다. 그 길에 어울리는 탈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제가 십년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가운데 네팔산맥에서 살아가는 세르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그곳에 높고 싶은 네팔 산맥을 물건을 나르는 세르파들이 사용하는 이동수단이 바로 나귀들이었습니다. 나귀들은 작고 연약하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지만, 높고 가파르곤 험한 곳을 오를 때는 적합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댓구하지 않고 산을 오르내리며 세르파와 함께 동행하는 나귀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오늘 당신은 누구를 태우고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교황이 탔던 차량이 저는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분도 교황께서 무슨 차를 타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바로 소형차인 쏘울을 탔습니다. 아마도 그 이름이 한 몫을 하긴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쑈라고 말하면서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설교 이상의 설교를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작은 차를 통해서 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섬김과 겸손 그리고 낮은 자리로의 회복메시지를 그는 소형차를 타면서 몸으로 행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훌륭한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주 우리나라를 훈훈하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헌법재판소 소장역을 맡고 있는 은퇴를 앞둔 문형배 소장입니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오히려 청문위원들인 국회의원들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재산형성 과정에 한치의 불법도 없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신고한 재산액은 4억원이었습니다. 고위 법률가로서 그는 마음만 먹으면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살아가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말을 탈 수도 있는 삶이지만, 나귀를 타고 사는 가난한 삶, 섬기는 삶을 살 것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자발적인 겸손, 자발적인 순종의 과정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모든 실재는 과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완성의 형태로 우리를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동행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귀는 그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 과정을 걷고 있는 우리의 마음 가짐을 말합니다. 우리가 품은 마음을 나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빠르지 않고 더디기만 합니다. 때로는 그 느린 속도에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조바심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통해서 우리를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누구를 태우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동행을 하고 있느냐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나귀를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더 불편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것이지만 주님은 그 나귀의 삶을 택하셔서 자신의 순명으로 살아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참으로 좋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꺼이 예수님을 그 십자가의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얼마 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상영되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아버지 관식씨,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관식씨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특히 공감을 했던 것이 관식씨가 고단한 삶을 살기 위해서 평생을 하루에 다섯끼를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관식씨가 제일 먼저 죽게 된 것은 그 사람이 늙어서가 아니라, 하도 가족들을 위해서 고생을 하다 보니 생명을 제촉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관식씨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은혜가 되었던 것은 억지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고난을 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입니다. 이 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특별 예배나 기도회를 드리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들의 삶 가운데 십자가가 깊게 드리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귀에 대해서 묵상을 하면서 우리들의 일상의 삶 가운데 드리워져 있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묵상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발견하신다면 여러분 기쁜 마음으로 나귀와 같이 그 십자가를, 아니 예수님을 태우시고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굳건히 걸어내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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