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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설교 2025. 5. 11. 10:46
나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요한복음 10:22~31
우리는 매일 같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마음에 남고, 어떤 이야기들은 스쳐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과는 대화가 깊어지고, 어떤 사람의 말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지요.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스무 해 동안 목회를 하며, 전통적인 방식의 목회보다는 삶 속에 함께 머무는 방식을 택해 왔습니다. 수요예배나 새벽기도 같은 프로그램보다, 교우들과 함께 걷고, 커피를 마시고, 삶의 대화를 나누는 예배를 더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왜 우리 교회는 새벽예배가 없느냐고요. 왜 수요기도회를 하지 않느냐고요. 그 질문에는 종종 비교와 실망이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요?“
어느 날 한 청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성경 말씀만 하시잖아요.” 그 말이 제게는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겪는 고통과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기보다, 그 문제 앞에서 성경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함께 듣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사실 궁금한 게 성경이 나한테 하는 말이야. 예수님이 지금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가 더 중요해.” 그 청년은 결국 교회를 떠났지만, 저는 지금도 종종 그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그 친구가 다시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제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복음 10:27) 듣는다는 건 단순히 소리를 인식하는 게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닿고, 그 말이 나를 움직이고, 그 음성이 내 발걸음을 이끄는 것—그게 바로 ‘듣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내 뜻에 맞는 응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 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미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씀은 진리 그 자체이지만,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 하지요, 말도 이와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2. 나는 사랑받는 자라는 정체성에서 신뢰를 찾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10:28) 이 말씀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이건 정체성에 관한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이런 표현입니다.
“너는 내 손 안에 있다.” “너는 내가 끝까지 지켜낼 존재다.” 그 말은 결국, “너는 사랑받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곧잘 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더 열심히 살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성과를 내야 가치 있다고, 남보다 앞서야 인정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조금만 실패하면 스스로를 비하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말하자면 거래입니다. 우리는 자꾸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결제할 수 있고,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사랑으로 우리는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쉴 곳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런 시대의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사랑’을 경험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는 예일과 하버드에서 교수로 지냈고, 세계적인 영성가로 존경받았지만, 자기 안의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캐나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 지적장애 청년 아담을 돌보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담은 나우엔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그에게는 ‘예일 교수’도, ‘작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헨리로 받아들였고, 존재 자체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곳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담과 함께 있을 때 처음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무엇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다.” (“Being the beloved expresses the core truth of our existence.”) 그는 바로 그곳에서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야 비로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진짜 나’로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아이가 들어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가 바로 헨리나우엔이 들었던 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란다”, “너는 소중한 아이란다”, 이 말이 바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언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마태복음 3:17) 얼핏보면 단순한 이 한마디 고백이 예수님의 전체 생애를 이끌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처음 들어야 할 음성도 바로 저 고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요즘에 젊은이들을 다시 만나면서 저 말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3. 내 의심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상처의 신호는 아닐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요한복음 10:25)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분명하게 말해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들도 있었고, 수많은 기적과 표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처해있었던 상처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다윗의 왕국이 회복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 모든 것을 회복시켜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기대는 절박함에서 왔지만, 그 절박함이 너무 커져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왜곡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말씀하신 예수님의 진실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나와 있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시간들, 원했지만 거절당했던 기억들, 누군가에게는 들어맞는 신앙 공식이 나에게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낙심의 순간들… 그런 마음의 경험들이 우리를 조용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 걸까?”
“나는 왜 믿음이 이렇게 부족할까?”
하지만 그 질문 안에는 믿음 없음이 아니라 깊은 상처가 숨어 있습니다. 상처는 신앙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도 합니다. 그 상처를 예수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왜 믿지 못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왜 자꾸 도망치고, 왜 마음을 닫고, 왜 말을 아끼는지도 아십니다.
저는 믿음은 결심의 문제를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믿음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안고서도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상처를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비로서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상처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4. 나는 지금 누구와 대화하며,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과 마주합니다. 뉴스 속 이야기, SNS 피드 속 남의 삶, 광고가 보여주는 행복의 기준, 자기계발서가 들려주는 성공의 서사들, 물론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지금 너는 충분하니?”, “더 노력해야 되는 거 아니니?”,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고 있진 않니?” 그 소리들은 빠르고, 강하고,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쉽게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들을 우리를 불안으로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물어보십니다. “지금 너는 누구의 말을 듣고 있니?” “지금 너는 누구와 대화하고 있니?” “지금 너는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 살고 있니?” 그분의 음성은 크게 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고 그 음성을 따라살 때 그의 삶에는 영생의 삶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작년 11월, 제게는 목회의 여정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들이 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예배당 지하로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평소에는 혼자 있을 때 예배당에 잘 가지 않는데, 그날은 마치 누군가의 부르심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공간에서 불현듯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저는 하나님께 되물었습니다. “주님, 뭐가 충분합니까?” 그리고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교회는 이미 충분하다. 저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작고 부족한 교회처럼 보였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감당하기엔, 그 삼십 명도 너에겐 많은 이들이다”.
그 순간 저는 위로받았고, 마음이 환히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은 세상의 숫자와 논리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와 사랑의 진심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제 삶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더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하며 매일 매일 제가 누려야 하는 삶의 축복이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음성은 오늘도 제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너는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 살고 있니?”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듣고, 다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헨리나우엔은 저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면 끊임없는 번민과 고독 속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데이브레이크 센터에서 단순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의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를 이제 한 단계 더 성숙한 신앙의 길, 신뢰의 길,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이 교회가 헨리나우엔이 머물었던 데이브레이크센터와 같은 곳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이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곳에 모아야 하며, 우리의 마음의 안테나를 오롯이 주님에게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흩어지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조용히, 그러나 깊이 말씀하시는 주님,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소리들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음성 앞에 우리의 마음을 머물게 하소서. 주님, 우리는 살아오며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때론 상처받고, 때론 지치며 삶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걷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우리가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우리 안에 새기게 하소서. 성과가 아니라 존재로, 비교가 아니라 신뢰로, 내가 누구인지 아닌지보다 당신 안에 누구로 불리고 있는지를 기억하게 하소서.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았던 이들이 있다면, 그 상처를 품고도 다시 귀 기울일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믿음 없는 자로 정죄하지 않으시고, 상한 마음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다시 듣게 하시고, 다시 걷게 하시고, 다시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이브레이크 같은 교회 되게 하소서.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 걷는 교회 되게 하소서.우리 각 사람이 흩어지는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음성을 따라, 조용히, 그러나 담대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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