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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길, 쉬운 길설교 2024. 10. 13. 10:27
어려운 길, 쉬운 길
마가복음 10: 17~31
축복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충분히 누리고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는 부족하지 않고 이미 충분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인사를 하게 된 것은 어느 때 우연히 제 삶을 돌아보니 수많은 물건들과 일들 그리고 관계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객관적으로 볼 때에도 부족함보다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나는 이미 충분하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서적이라고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주님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에게 “왜 나를 선하다고 생각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이 사람이 물어보신 것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시고, 또한 그 사람이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 보신 까닭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선하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과 행함, 그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영생의 힘이 담겨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선하게 사는 것’도 행함의 리스트가 되는 것이며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 바로 그런 선함과 능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들은 예수님이 선해서 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먼저 ‘선한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인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선한 사람’, 곧 ‘의인’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이라는 것은 어떤 행함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것은 그가 이 논리 구조에서 성실했음을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물어보는 구조 안에서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읊어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그들이 지켜왔던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유대인들이라면 어릴 적부터 철저히 지켜왔던 것이고, 당연히 예수님께 나왔던 이 사람도 이 계명들을 준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예수님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면서 대견해 하셨습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길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던 이 어떤 사람은 어릴 적부터 유대교에서 가르쳤던 계명들을 모두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영생의 기쁨, 영생의 확신이 넘쳤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영생의 기쁨과 확신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의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사람이, 또한 옳은 행동을 한 사람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가 그동안 지켜왔던 계명들, 곧 십계명은 말하자면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기본 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본 규약을 받은 것은 바로 그들이 출애굽을 했을 당시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정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야 하는 땅이 있었습니다. 그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약이 바로 십계명인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들은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가진 것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님은 떠나간 사람을 보면서,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한 술 더 뜨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듯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명도박아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서로 수군 거렸습니다.
어려운 일, 쉬운 일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서 멈췄다면, 우리들의 삶에는 희망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수군거리고 예수님을 떠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말씀을 마치시지 않고 놀라운 복음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영생의 소망으로 깊이 세겨지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품어야 하는 믿음에 대해서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단체 행동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빚을 내서 고가의 아파트를 구매했습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은행으로부터 지고 아파트를 구매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에게 어떤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불패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노동은 힘이 없지만, 부동산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정부와 언론이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부동산 업자들만 이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십계명을 무시하시지는 않지만 그것을 더 줄여서 한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함께 담을 넘는 사람들얼마 전에 에리히 찡어가 쓴 ‘함께 담을 넘는 하나님’이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에는 시편의 가난한 사람들의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을 고백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약자들이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말하자면, 가난한 이들의 경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온갖 어려움을 가득 차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도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쉬운 길을 보여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장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서 나눠줄 수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 사람의 삶에는 영생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사회복지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교회는 앞으로 더욱 더 사회복지를 넓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달려라커피’의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 삶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제 기업을 세워서 더 많은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만들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에게 행복한 일자리를 만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일이 주님께서 저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는 길임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 제 순명을 다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길을 인정하고 부르심에 순종하고 저와 그 순명의 길, ‘쉬운 길’을 함께 걸으시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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