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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일'설교 2024. 9. 21. 14:30
2024년 9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 18주, 농촌선교주일 참포도나무교회 설교
‘작은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일’마가복음 9:30~37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곳에 온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몇주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예수님을 더 많이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에도 오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금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너희는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그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신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던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걸으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읽은 복음서에서는 오히려 예수님을 제지하려는 베드로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선생님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지만, 그리스도가 걸어야 할 길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예수님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금 제자들에게 당신이 걸어야 하는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죽은 이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 곧 부활할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생각을 하면 그들의 여정에는 중요한 여정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 혼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는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고 또 감히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어떤 집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길 위에서 왜 서로 다투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를 두고 다퉜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부끄러운 행동이었던 것을 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당신의 곁으로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걸으시는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누구든지 첫째, 곧 프로토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코토스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바로 종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가장 낮고 마지막 자리에서 섬기는 일임을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고 불렀지만, 그리스도께서 걸으셔야 할 종의 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높이고 영광을 누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더욱 더 고립이 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걸어가야 할 길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고립감을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 아이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 들이면 곧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 예수님의 고립감이 더욱 깊이 느껴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키고 있습니다. 이 한 명의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장면이 마가복음 10장 13절 이하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며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게 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아이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뒤에 어린이들을 안고 손을 위에 얹어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씀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목적을 마치 죽은 뒤에 천국이라는 곳으로 가는 것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 나라를 수용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신약신학자들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에서 나오는 파이디온을 목적격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의 주된 강조점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신학자들은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세운 한 아이가 사실은 그 집에 있었던 특정한 한 아이를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고대근동 지역에는 아이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만했습니다. 물론 요즘과 같이 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아이들은 소수였습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나 병약한 아이들은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어린시절부터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살기위해 종의 신분으로 남의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세우신 이 한 아이는 작고, 미성숙하며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한 아이였을 것이라고 논문에서 말하는데 저는 이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해야 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당신을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처하신 깊은 고독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반대로 말을 하자면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어린아이와 제자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예수님과 그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임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를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어떤 종교적인 표현으로 하시지 않고, 시중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에는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마25:45)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높은 사람이 될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어린아이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파이디온’은 작은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근원적으로 작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미성숙하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삶 주변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받아들여서 섬겨야 하는 파이디온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들의 삶의 지침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삶의 지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높은 건물을 짓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더 많은 세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삶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이 첫째, 곧 프로토스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 때, 그 일로 인해서 뒤에 처지는 에스카토스, 꼴찌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뒤쳐져 있는 이들, 그리고 낮고 천한 곳에서 있는 이들을 맞아들이는 것, 수용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하는 삶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종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긴 여정을 걸으면서 제자들에게 신물이 나셨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걸어야 하는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고 서로 다투는 제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제자에게조차도 거절당하는 당신의 처지가 안타깝게도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묵묵하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서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보면서 그 아이를 안으시고 축복하시며 제자들에게 그들이 걸어가야 할 제자의 길로 지목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신앙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세우신 어린이들은 꼭 우리들의 자녀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변부로 밀려서 그곳에서 가장 낮고 낮은 자리에서 꼴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돌보아야 할 이들일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들의 눈으로 제단하고 생각으로 제단하지 말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본받아서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의 파이디온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주님,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이가 당신과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이고 하나님나라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하소서. 시편의 가난한 이들과 같이 가난하기 때문에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꼴찌가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https://www.youtube.com/live/qlMj9OWao0c?si=U-T12hB78xJa9v9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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