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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설교 2024. 9. 15. 10:31
2024. 9. 15 성령강림 후 제 17주,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27~38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이 이렇게 물으신 것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궁금하신 까닭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길을 걸으시는 가운데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신 것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다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단순한 호칭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길을 떠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따르는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베드로가 정답을 맞췄다”. “역시 베드로가 수제자인 이유가 있다”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만을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묘한 긴장과 대결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한 대답은 정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대답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명제에 대한 정의로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명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탁자입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한라산은 제주도에 있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답변도 이런 명제 정의적 답변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멈춰서는 안될 것인데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답변은 여기서 멈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유명한 대화가 바로 길 위에서 일어난 대화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빌립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가는 길 위에서 던지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질문은 기 여정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빌립의 가이사랴’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지역은 아버지 헤롯대왕에 의해 만들어진 지역인데 그는 이 마을을 헬라 신에게 헌정했습니다. 그의 아들 빌립이 이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빌립의 가이사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헐몬산 남쪽 경사지에 있으며 요르단 강 발원지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통상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알려졌는데 작은 강들이 사방으로 흘러서 시원한 공기가 흐르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이 지역이 헬라신과 로마황제에게 헌정되었던 것을 보면 이지역이 유명한 관광지였을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를 걸으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질문은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걷고 있는 이 길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왜 이 여정을 떠나고 계신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는 부분에서 ‘길’이라는 은유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본문은 이 ‘길’ 은유가 제자들에게 적용된 첫 번째 경우입니다. 물론 길은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노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은유적인 차원으로 본다면 이 길은 예수님께서 앞서서 걸어가신 길이자, 제자와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이 놀라움과 두려움 가운데서 뒤따라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바로 이 ‘길’의 은유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고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경고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명제적 정의로 당신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을 멈춰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과 제자들과 청중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명제적 정의로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동사에 대해서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질감에 대해서 자세하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드러내놓고 가르치시 시작하셨다고 마가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니 조금 전에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던 베드로가 심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했습니다.
그의 고백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이곳에서 포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갈등이 분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불만과 비난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한 것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정치적인 메시야로 등극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명제적 대답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는 공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백이 어떤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명제는 곧 삶에 대한 고백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삶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따로 떼어놓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서 묻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에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고백을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뜻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항의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선생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학생이 되는 것은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하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비난 받았으며 이제는 심지어 제자들 중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 의해서도 심하게 비난을 받고 거부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신자들이 하는 말들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의 말들에서 울렁증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백할 때, 단순하게 명제적 정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Business as a Mission’라고 말합니다. 신학교 화장실에는 ‘신학생은 이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명제적인 구호들은 허망하기에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명제적인 정의로 인해서 자신들의 활동들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명제적인 정의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고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인가?’, ‘우리의 노동은 과연 거룩한가?’,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도의 삶을 따르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는 깊이 고민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을 하고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갈등을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를 비난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될 것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를 선생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이런 갈등이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삶, 제자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제 밤에 요즘 믿음의 교제를 함께 나누고 있는 목사님 부부와 늦은 시간까지 친교를 나눴습니다. 목사님은 선교사로 지내시다가 한국으로 들어오셨는데, 한국에 계실 때 한 모임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 전승하는 모임인데 창립자 목사님의 뒤를 이어서 제자목사님들이 그 모임을 이끌고 있는데, 창립자 목사님의 말씀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실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제자로 되어가야하는 과정일텐데 그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고백을 만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요 그리스도로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만 그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 가운데서 조금씩 예수님의 제자들로 성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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