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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참포도나무교회 목회서신 '그리스도의 형상 이룰 때 까지'설교 2015. 6. 12. 22:56
2009년 참포도나무교회 목회서신
“그리스도의 형상 이룰 때 까지”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갈 4:19)
모든 동네의 길거리마다 교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사들이 넘쳐나고, 교인들이 넘쳐나고, 거리마다 교회들이 넘쳐납니다. 백화점 같이 대로변에 우뚝 선 교회도 있고, 할인마트처럼 연일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거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네 수퍼마켓처럼(저는 이 단어에 연민을 느낍니다.) 동네 어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동네교회들도 있고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교회는 교인들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할 만큼 작은 지하교회들도 있습니다. 백화점교회, 할인점교회, 동네교회, 그리고 지하교회들이 우리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우리 동네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교회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밤에 창문을 열고 동네를 바라보면, 별빛보다 밝게 빛나는 교회들의 십자가 네온 빛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동네 밤하늘을 홀로 밝히고 있는 무수한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볼 때마다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 교회들은 어두운 이 세상에 어떤 빛을 비추고 있을까?” “우리가 비추는 빛이 저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까?”라는 질문들을 해 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 있게 ‘그렇다, 오늘 교회들은 사회에 빛을 비추고 있다’라고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에 빛이 되심을 믿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던 못 느끼던 간에 예수님은 지금도 온 세상에 구원의 밝은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의 빛이라고 믿는 신앙의 고백은 동시에 ‘나 또한 이 세상의 빛이 되겠다’는 고백을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세상의 빛이 되어라” 이것은 바로, 모든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방식 그 자체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빛 된 존재로 서 있습니까? 과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들의 빛으로 인하여 참된 빛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대답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우물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자화자찬하는 과오를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빛 된 존재로 서 있는가?”를 매일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동네를 둘러보면 그 어떤 빛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세상에 빛을 비추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하는데 한 몫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교회를 통해서 어떠한 빛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다른 종교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지금의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논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각성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흥과 성장이전에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모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흥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우선순위입니다. 지금과 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는 한국교회는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고, 목사가 되는 것만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중간에 잠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고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 삶의 목표가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지난 2008년 4월에 감리교회 정회원목사로 안수 받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꿈을 이룬 셈입니다. 그런데 정작 목사가 된 제 마음 속에는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하여 무려 18년 동안 고생을 해서 마침내 목사가 되었는데, 정작 목사가 된 제 마음에는 뭐라고 형언할 수 허전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이 허전함의 이유를 알지 못해서 한동안 당황스러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자, 이제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인이 되자”
맨 처음 이 마음의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거의 30년간을 목사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고, 이제 가까스로 목사가 되었는데, 제 마음 속의 울림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이 되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목소리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 떳떳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자는 자성의 소리였고, 지금부터라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는 굳은 다짐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백은 목회자에게 부끄러운 고백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부끄럽기 보다는 오히려 제 마음은 이 소리를 들은 이후 희망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온 통 제 마음 속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평안함이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고, 그 날 이후로 제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삶”으로 우릴 이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제는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가치, 이상, 신념들을 붙잡고 살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들이 중요해 지고, 감사하지 않던 것들에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지 않던 것에 기뻐하게 되고, 바라보지 않던 것들에 대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삶이며, 거듭난 삶입니다. 저는 이렇게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해 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아정체성 회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신앙고백의 구조를 좀 더 세심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들은 얼마나 많은 세례를 베풀었느냐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세례식이라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세례를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양육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교회 직제들 또한 본래 의도에 맞게 사역중심의 직제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제일 먼저 직분의 남발을 조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아정체성입니다. 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명만으로도 동네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넘쳐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는 그렇게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연약하지만, 그 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연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19절에서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누구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방해자였다가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바뀐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에게는 마치 해산하는 고통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사도바울은 다시 자신의 영적 자녀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번의 영적 경험을 겪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고, 둘째는 자녀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해산의 경험이 사실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해산의 경험은 바로, 타인을 위한 해산의 고통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 면밀하게 보면, 이 두 가지 해산의 경험은 하나입니다. 여인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연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해산한 어머니는 더 이상 연약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자 마다 연약한 여인은 간 데 없고, 강한 어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후에는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하게 됩니다. 연약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강인한 어머니가 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더욱 더 강인한 그리스도인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을 시작하는 제 마음 속에는 이러한 희망으로 가득 넘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제한파로 인해서 온통 마음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과 머리에는 온통 ‘경제회복’이란 한 단어로만 가득 차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만 걱정 없이 살면 된 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 다”는 잘못된 생각이 전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경제를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걸림돌도 허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실용’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어떠한 ‘원칙’과 ‘신념’도 남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대자연도 ‘경제회복’이라는 명분에 의하여 훼손 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경제회복이라는 단어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메마른 영적 현주소입니다.
좀 과장되게 이야기 하자면, 성서 인물 중 어느 누구도 “경제회복”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어떻게 하면 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웃들과 어떤 나눔을 해야 할까?”이러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들을 묻고 또 물었고, 그리고 그 대답들을 자신의 삶에서 이루고자 노력했습니다.
저는 지금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경제회복’말고도 더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당장의 편함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하도록 우리는 가르치고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고, 우리 자녀들에게서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를 것이 아니라, 상생과 나눔의 삶을 그 대안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히려 약한 자들과 소외받은 자들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야 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자신만의 삶으로 버거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빠진 이웃들을 돕기 위해 우리의 연약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고 오늘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그 정체성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종류의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 안에 바로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그는 기도 속에서 참자아를 발견하고, 형제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일지언정 그들의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 질 때까지 해산하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가득 넘칩니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허다한 증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비록 따로 떨어져 있고 때론 그 방향을 상실하여 표류하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마음을 먹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는 세상을 변화시켜서 뒤집어엎는 강력한 힘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느 은행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One for All, All for One”.
“한명은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한명을 위하여”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이 구절을 만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들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한 분이신 예수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핏 값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마음을 품고 삽시다. 다른 것에 마음과 시간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던지 우리 삶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노력합시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나와 함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합시다. 그리고 다수(多數)보다는 고통 받는 소수자(小數者)를 보호하고 아끼는 일에 분연히 일어납시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록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태초에 비추었던 그 창조의 빛이 동네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생명의 빛을 보고 있습니다.
2009년 1월 1일,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첫 시간에
참포도나무교회 안준호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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