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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이 가난한 사람 / 2021년 참포도나무교회 표어
    설교 2021. 1. 2. 21:51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태복음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이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저희들은 매년 이 시간을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떼제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동일한 기도회 모임으로 모였지만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예배당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서 기도회를 하며 송구영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또한 코로나로 인해서 바뀐 우리네 일상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이제 거의 일년 이상 코로나로 인해서 바뀐 일상을 지내고 있으니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고 갈수록 우리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마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우리의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시간들인 것 같습니다. 새해를 기대하면서 코로나를 극복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들이 있지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더욱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2021년의 시간, 우리 모두의 삶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고 또한 희망적인 일들이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한해를 준비하면서는 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주제를 2021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로 삼았습니다. 2020년도에는 그 한 사람이란 표어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했습니다. 그 표어 때문이었는지 정말 올 한 해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개인으로 주님 앞에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 한사람이라고 고백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신앙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부터 한 십년 정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순례자들로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것을 화두로 던지고 그 화두를 붙들고 하루 한주 한 달 한해와 한 평생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 마음 가운데 제가 생각한 첫 번째 마음은 바로,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하는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가르침에 가깝고 또한 대화에 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하여 대화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왔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위를 즐기려고 그 자리에 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가르쳐 주어야 할 삶의 원형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평생을 통해서 그 삶의 원형을 가르치시고자 했고, 또 그것을 삶으로 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에 있던 가르침으로 성서 중의 성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황금률, 곧 황금과 같이 귀한 가르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은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을 지키는 것을 자신들의 삶의 금과옥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대교회 신자들의 삶 속에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황금률로 생각했던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잊혀지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는 팔복의 가르침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이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성서에서 나온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현대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자주 하는 방식으로 이 말씀에 신학적 각주나 문학적인 각주를 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전해졌던 곳도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던 가버나움의 작은 산위에서 행하여진 것입니다. 그곳에 잠시 머무는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땅히 따라야하며 살아내야 할 팔복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여간 여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말씀을 따라서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을 언어그대로, 존재그대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신 팔복의 말씀 가운데 하나를 읽으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곧 우리의 마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에게 마음이란 것은 낮선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의 삶을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율법이 물론 지향하는 곳이 결과적으로는 마음이겠지만, 율법은 주로 사람의 행동과 외부적인 것들, 측량이 가능한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주의자들은 흔히 외식하는 자들이 되기 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신자들의 마음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을 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삶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에 관심을 두고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스라엘 랍비들은 하나님을 마치 성전 속 깊은 곳 지성소에 계신 분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이 가는 곳에 깊은 시선을 두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겉모습을 보고 외면을 보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외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인 제자들, 그를 따라 나선 이들에게 마음이 가난 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성서의 모든 부분 가운데 제일 어려운 질문이 바로 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가난한가요?“,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마 여기서 자신있게 네 저는 마음이 가난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스스로가 마음이 가난하다고 자랑하는 것은 마음이 진정으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실 마음이 가난한 것 보다는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는 더욱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때론 옹졸하고 옹렬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의 그 뜻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이 표현이 오히려 누가복음의 후대 본문이라고 말하면서, 원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누가복음 6: 20)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였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는 굶주리는 자들, 그리고 배척당하고 욕을 듣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악하다고 내쳐지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분명하게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팔복의 내용과는 분명한 온도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라고 말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이 두 본문을 떨어뜨려서 다른 본문으로 읽기 보다는 중첩된 본문으로 읽을 때 더욱 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그 뜻을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때에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명쾌함을 얻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 본문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본문으로 우리가 풀기 힘든 퍼즐처럼 생각하고 골몰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에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의 해석과 적용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오히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큰 틀에서 답을 도출하는 것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울사도께서 보낸 서신서가 우리에게 답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들에게 빌립보서 2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곧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할 수 있는 분이였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이 마음이 바로 가난한 사람이 가지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케노시스(Kenisis)라고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우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예수께서 품으셨던 마음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도 그마음을 품고 살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올려주신다고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높아질 것을 의도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흉내를 내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정말 낮은 자리로, 내려가고 자신의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것들을 비워내가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인의 삶을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서 자유롭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셨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길,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교회에서 이런 찬양을 많이 불렀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하네 자 내일 걱정일랑 버리고 모든 염려 주님께 맡기세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을 위해서 베풀어주는 것, 나눠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가장 고귀한 케노시스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삶, 자신을 비워내가서 결국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께서는 이것을 스스로 2등이 되는 삶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 페친이 올린 글을 보니 그분께서 존경하시는 한 목사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례요한과 같이 스스로 2등이 되는 삶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스스로 1인자의 삶, 주인공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자신은 그분의 신들메로 풀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렇게 했던 것이 세례요한이 자존심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설명이 참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람들에게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였고 기다렸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앞세웠습니다. 자신은 망하더라도, 예수님은 승리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사라지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높이 서길 바랬습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삶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 예수님으로 인해서 박해를 당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복음의 공식과도 같이 읽고 해석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고 더 높은 하늘 나라에 있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도피적인 피안적인 신앙으로 나가라고 등떠미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늘 나라의 가치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귀한 하늘 나라의 가치가 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나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보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보상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성과를 얼마나 이루었느냐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 속에 어떤 가치를 품고 또 우리가 어떤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주 작은 일들이라도 십자가로 지고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붙들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참포도나무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섬기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과 일들 그리고 사역들을 어떻게 붙들고 사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는 지난 2004년에 개척한 이후로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름다운 교회란 뜻은 교인들이 얼마나 모이느냐의 문제, 교회 예배당이 얼마나 큰가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말한 교회인가의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름다운 교회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성서와 교리와 신학에 많은 지식을 가진 것도 아름다운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질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아름다운 교회’,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는 무엇일까? 오늘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작은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 저항하는 고백입니다. 큰 것이 아름답고, 힘을 가진 이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작은 존재들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이즈와 성도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바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다른 이들을 지적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나의 생각과 기준으로 제단하고 정죄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워서 빈터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고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나예배당과 커피마을 그리고 사랑방, 마을공작소, 길목공소의 공간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섬은 길목교회의 공간으로 우리가 무상임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을 꾸려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벌써 십년 이상을 12월 마다 저와 제 아내는 은행으로 끌려가서 그들에게 도장을 찍고 와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그 빚을 갚아주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청년 몇 명의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쉬워보이지만,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저는 일년 365일을 쉬지 못하고 매일 매일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그런 모습이 목회자가 해야 할 목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우습게 볼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셨던 하나님 나라의 목회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저희는 이제 인터넷과 디스플레이로 서로를 마주하면서 생활신앙공동체를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한 해가 여러분들에게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과 같이 가난한 마음,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나가는 일꾼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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