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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주일공동체예배 '지극히 작은 한 사람'설교 2020. 11. 22. 14:40
www.youtube.com/watch?v=NloLZJOPoco&list=LL&index=1&t=438s
물음 :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
본문 : 마태복음 25:31~46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간인 ‘왕국주일’입니다. ‘왕국주일’은 교회력의 마지막주간으로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의 바로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과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 있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역사의 왕이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우리의 주권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이 선포하시고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깊이 묵상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인자’ 곧 예수께서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그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그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창세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잡수실 것을 드리고 또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영접하고 옷을 입히고 그리고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그렇게 그들의 삶을 칭찬하면서 ’의인‘이라고 평가해주시니 그 평가에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들에게 말을 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님에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지극히 작고 연약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임을 말하고 그들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상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은 또한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더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 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편에 있다가 축복을 받은 사람과 정 반대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때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임금의 태도가 무척이나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드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에 적절한 행동을 하였고,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아드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기준은 예수님에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함께 살고 있는 그 사회속의 지극히 연약하고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 아니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놀라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25장 이전 23장과 24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사람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한다. 17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위선자들이고 그들은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이들이며,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돈으로 가득한 곳으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것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비리새파 사람들은 스스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이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들이 든든한 후원자이자 하나님을 추종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같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죄값을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잘 알고, 잘 모시는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만 유일하게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그들은 위선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있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에 임금 앞에 섰을 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설 곳은 바로 오늘 본문에 왼편에 선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헤롯궁전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지 않으시고, 갈릴리에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죄인들과 세리 그리고 거리의 여자들과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행을 다니실 때도 굳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잇길로 다니셨습니다. 그 곳에는 두 마을에서 쫓겨난 가여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작은 이들을 마치 하늘의 뜻을 받아서 섬기듯이 섬기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이 예수님을 잘 섬기고, 또한 그분이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리고 또한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치료하고 또 방문하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의인으로 치켜세우고, 그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면 저는 아마 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질정도로 교회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안은 가난함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녀들과 아이들로 넘처났습니다. 교회는 그녀들과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부터 경제 개발이 되면서 사회와 더불어 교회도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부자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두 가난한 교회였는데 이제는 가난한 교회와 부자교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이 많이 오는 교회는 부자교회가 되었는데, 가난한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고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속에 교회에도 양극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비춰서 생각해보면 가난한 교회 부자 교회로 나누어서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오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임금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느냐?’라고 물어보거나, ”너는 나를 얼마나 잘 섬기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만난 작은 이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얼마나 잘 섬기었느냐를 물으시고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신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복음이자 또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경고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위에 함께 하는 작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은 바로 그것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서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아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일을 하는 가운데 한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동두천에서 마을의 아이들을 오랫동안 돌보셨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매일 밥을 해주고 그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아이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명문대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한결같이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 사모님은 자신의 모든 젊은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고립감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사모님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런 이들이 수두룩빽빽합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찾아온 작은 자들과 함께 더불어서 살다가 보니까,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된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서 그들을 입히고 먹이고 어려울 때 함께 해주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의인이 되기 위해서 작은 자들을 섬기자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갈릴리 마을에서 사람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죄인들과 함께 저주를 받는 가운데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구세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왕국주일을 맞이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종교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가 우리들의 삶에 원형경기장이 되어서 이곳에서 시간과 시름을 잃어버리고 이곳에서 모모와 같은 사려깊은 친구들이 되어서 이곳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나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곳이 바로 ‘작은 자’들이 서로를 먹이고 마시게 하며 어려울 때 찾아가주고 또 위로하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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