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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새 힘을 주시는 주님 / 시편 23편
    설교 2014. 3. 31. 15:58

    2014년 3월 30일 참포도나무교회 주일예배 설교

    제목 : 다시 새힘을 주시는 주님

    본문 : 시편 23편

     

    다시 새힘을 주시는 주님 from Ahn Junho on Vimeo.

     

    어제 예배를 준비하면서 성서본문을 고르려고 교회력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교회력 구약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으로 다윗을 세우는 내용이 쓰여 있는 사무엘상 4장 본문과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시편 23편 본문이었습니다. 그 전 같으면 저는 순서대로 시편을 읽었을텐데 어제는 읽지 않고 그냥 넘기려 했습니다. 신약을 찾으려는 순간 제 마음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왜 시편 23편은 읽지 않고 지나치니?"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왜 그냥 읽지도 않고 넘어가려 했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뭔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알아차린 뒤에 그 자리에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저는 성서를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준엄한 꾸짖음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물으십니다. "니가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 "아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깨닫고 멋진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란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설교는 그저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쓰임받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데 저도 모르게 그 기본적인 자세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설교를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설교는 성도들에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자의 자리가 전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그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고백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을 때 제대로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설교자는 평생을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마음을 다잡고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새번역 성서로 읽어 내려가던 중, 저는 그 전에는 읽지 못했던 단어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편 233절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2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이 말씀 가운데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에 제 눈길과 마음이 멈췄습니다. 제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그 전에 이 본문을 읽을 때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 아니면,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와 같은 구절들이 마음에 다가 왔는데, 이 날은 '다시'라는 부사에 제 눈길이 갔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 "he restores my sou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Restore는 영어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다 떨어져 버린 것을 다시 채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서를 읽는데 하루 종일 지쳐 있는 제 영혼에 한 줄기 빛이 비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시편23편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식당 같은 곳을 가면 벽에도 자주 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이 말씀을 얼핏 들아봤을 정도로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말씀을 접할 때 이 말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 목사들도 그런 함정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니 신앙을 벗어나서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실 그것은 전체의 일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저희 가족은 저와 아내 그리고 여섯날 위민이 이렇게 셋입니다. 저는 요즘 여섯살 된 위민이가 많이 낫설어졌습니다. 제 아들이기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요즘 가면 갈 수록 더 모를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를 가면 갈 수록 모를 것만 같습니다. 그 동안은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참 즐겁고 흥미롭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갈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 순간 한 존재를 대하는 신비로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상대를 소외시키고 상대화 시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 우리가 시편23편을 잘 알고 있지만, 이 본문을 알고 고백하고 매일 매일 그 고백 가운데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성서의 그 어떤 것을 더 알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편 23편 한 편이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전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편 23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인도하심 구원하심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다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지식과 인문학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지 않고 시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23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사랑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 없이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시편 23편을 안다고 할 때에는 적어도 우리의 영혼이 시편23편의 기자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23편이 참 놀라운 것이 이 시편을 거의 외우다시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적감흥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름다운 시어가 주는 힘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이 단어 "Restore"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단어는 무언가 비어있어야만 그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항상 충만한 상태라면 다시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미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면 '회복'이라는 단어가 쓰일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 누구라도 예수님께 나온 이후로 그 어떤 유혹과 환란과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회복'의 은총은 거의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고 우리의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들로 주님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 주일 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의 기자가 다윗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시편을 다윗이 전부 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이름으로 모아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편23편은 전통적으로 다윗의 시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다윗의 삶의 여정과도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뽑힐 정도로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서가 그리는 그의 모습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남자 중에 참 멋진 남자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많지만 왕으로 뽑힐 당시만 하더라도 형제들 중에서 그리 눈여겨 볼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모두 사무엘 앞으로 나아갔을 때 산 위에서 양들을 쳐야 만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사울에 비해서 신실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다윗은 평생의 삶 속에 잊혀질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탐하고 그 일이 들통날 까봐 부하를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무엇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사무엘상 167절에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윗의 형들에게 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그 이유를 어슴프레 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상하고 찟긴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사울왕의 위협을 피해서 산과 들판으로 유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사울의 눈을 피해서 숨어 지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이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하고 찢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일 뿐이 없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비고 비인 마음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한탄소리는 찬양소리를 바뀌었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복'된 사람입니다. 비록, 그는 왕이 된 이후에 교만하여 또 여러번의 잘못을 저지르게 되지만, 우리와 같이 자주 한계를 만났지만, 그가 사울과 다른 점은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복하고 회개하여 '회복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일까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고 선한 삶, 성자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아름답고 행복한 삶, 손상되지 않은 삶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요?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왜 화가 나십니까? 그것은 자녀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회복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의 힘을 받아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새힘으로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주기적으로 주유소에 나아가서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공급받지 못하면 운전할 수 없습니다. 힘이 떨어지면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밥을 먹고 힘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새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하십니까?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십니다. 그래서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바로 이 영적인 축복과 회복시켜주는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영원히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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