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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삶에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설교 2025. 6. 8. 13:02
제목: 왜 내 삶에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본문: 요한복음 14:8–17, 25–27
1. 당신의 삶에선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주님의 은총이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특별한 날이 아니라 바로 이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조용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조금은 도전적인 제목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그 제목은 바로, “왜 당신의 삶에선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입니다. 혹시 이 질문이, 다른 누군가를 향한 추궁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며 저는 무엇보다도 이 ‘당신’이 바로 이 설교를 전하는 제 자신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설교는, 여러분을 향한 말이기보다 우리 모두를 향한, 그리고 제 자신을 향한 묵직한 질문의 시작입니다.
2. 왜 기적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신약성서에 그렇게 자주 등장했던 기적들은 오늘날 우리 삶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던 그 시대의 놀라운 일들은 왜 이제 우리 곁에서는 그 흔적조차 드문 듯한가요?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많은 신학자들에게 깊은 화두였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기적을 “신화적 언어”로 보았습니다. 그는 현대인이 더 이상 마귀나 귀신, 초자연적 개입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기적을 문자 그대로 믿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적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하나님의 구원 의지, 존재의 변화—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몰트만은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적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은 기적이 필요 없을 만큼 질서정연한 세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이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바랄 만큼 간절히 사는 이들이 줄어든 세상, 기적을 받아들일 내면의 ‘공간’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C.S. 루이스는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전합니다. 그는 『기적(Miracles)』이라는 책에서 기적을 자연법칙의 단순한 위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조용히 개입하는 특별한 순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우리의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루이스에게 기적은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채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루이스는 그래서 기적은 ‘확실히 벌어지는 사건’이라기보다, 영혼이 깨어 있을 때만 인식되는 하나님의 조용한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신학자의 말들을 가만히 모아보면, 우리에게 던지는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됩니다: “기적이 정말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기적을 알아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인가?” 여기에 제가 다른 말을 붙일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에겐 그 기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3.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요 14:14) 이 약속은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실언하시거나, 빈말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반응은 종종 무덤덤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약속을 “내 삶에선 해당되지 않는 문장”처럼 읽고 지나칩니다.
말씀은 분명히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자신의 삶과는 분리된 이상론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아마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주님은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4. 기적을 보여달라는 마음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주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적이라도 하나 보여주셔야 믿겠어요.” 오늘 본문 속 빌립의 고백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만족하겠습니다.” (요 14:8)
저는 빌립의 말이 이렇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확실한 걸 보여주셔야 믿을 수 있겠어요.” 기적을, 증거를, 가시적인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빌립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길을 걷고, 말씀을 들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이미 보고 있는 사람이, 기적을 보여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이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응답의 장(場)은 우리 삶의 오늘이라는 자리 위에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보여주신다 해도, 우리는 또 다른 기적을, 또 다른 증거를 원하게 될지 모릅니다. 기적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저 ‘증명’을 위해 요구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소비입니다. 빌립은 이미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바깥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알지 못하였느냐?” (요 14:9)
5. “기적은 이미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14:9–10) 성서는 예수님이 곧 아버지이고 그 안에 성령님께서 이미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고 있는데 또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기적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기적은 안중에도 없고 또 새로운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이미 곁에 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기적’을 원했지만, 그 기적을 이루는 주님과 지금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기적은 먼 하늘이 아니라,
지금 너희 곁에 조용히 와 있는 나 자신이다.”
6. 우리 안에 자리한 왜곡된 기대 – 기적을 오해하는 신앙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해방자, 눈부신 기적을 베푸는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믿으면 잘 돼야지.” “기도했으니 응답 받아야지.” “내 뜻대로 돼야지.” 이런 기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대한 방식’을 믿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기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옵니다. 주님이 펼쳐가시는 기적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마치 사자가 우리를 낚아채가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낚아채가시고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왜곡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7. 그러나 믿음은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이루겠다.” (14:14) 그런데 이 말씀은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마음으로 구할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응답받는다는 약속입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면 나는 거기에 순종하겠다”는 내어맡김입니다.
믿음은 자기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의 자리를 비워, 하나님의 뜻이 흘러들어 올 공간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8. 기적의 일상 – 커피트럭에서 배운 것들
저는 커피트럭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날은 너무 어려울 것 같은 하루가 뜻밖에 잘 풀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괜찮을 줄 알았던 하루가 계속 막히고, 거절당하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묻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안에 거하고 계신가요?” “오늘 이 상황을 통해 주님은 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가요?”
저는 지금 (주)달려라커피의 대표로서 이 목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표로서의 역활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든 일들을 하는데 있어서 효율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기까지 올라온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기적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희가 법인을 세우게 된 것도, 저 앞에 브리딩커피바를 번듯하게 세운 것도, 그리고 이제 새로운 차량을 구입해서 모모스테이블이란 브랜드로 런칭을 하게 된 것도 제 실력과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양시로 부터 밥차로 계약을 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유명한 피디님으로 부터 촬영장 밥차로 오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든 것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9.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몸은 하루에 약 5천 개의 암세포를 생성합니다. 하지만 면역 시스템은 그 암세포를 매일 감시하고 제거합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의 문턱을 조용히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심장은 하루 10만 번 뛰고, 우리는 하루 2만 번 숨을 쉽니다. 세포는 하루에 3천억 개 이상 교체되며 몸 안에서 매일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또한 우리가 지구에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지구는 우주 수십억 개의 행성 중 유일하게 생명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곳입니다. 화성은 영하 80도 아래로 떨어지고, 목성은 착륙할 땅조차 없으며, 금성은 유황과 이산화탄소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숨 쉴 수 있는 공기, 마실 수 있는 물,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이 땅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국 사회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는 ‘동경의 땅’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K-pop, K-drama, K-푸드… 한류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낭만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을 ‘경쟁’, ‘속도’, ‘피로’, ‘무너짐’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 꿈인데, 우리에게는 버팀인 이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0. 결론 – 기적은 이미 와 있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왜 내 삶에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건 어쩌면 기적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기적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기적은 내가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기적을 살아내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그 기적의 순간들을 감사함으로 향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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