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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주제 설교 '사랑이 살린다' 요한1서 3:16~18설교 2024. 1. 2. 10:09
‘사랑이, 살린다’ (Lieben Belebt)
(요한1서 3:16~18)
기독교신앙은 이천년 이상을 흘러오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신앙을 부정하려고 하는 흐름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것은 반대로 기독교 신앙의 자리가 세속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 바리새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신앙과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확고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사실 이 두 가지 계명이 같은 뜻이라고 해설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실현이 된 삶이 바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신앙은 ‘사랑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 머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에서 처음 들린 소식, 가장 중요한 소식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서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지만,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가인은 주님이 자신과 자신이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가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죄를 다스리지 못한 문제였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인의 문에 죄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죄의 하수인이 되어서 자신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동생 아벨은 의로웠지만, 가인은 악한 자에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의인과 죄인이 현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1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면서 아울러서 가인이 저지른 인류 최초의 살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하는 것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서로 대비시켜서 말하면서 결국 서로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요한 1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는 자이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힘주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서는 오늘 우리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도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성서를 읽는 것이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강조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낮선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쿨함을 강조합니다. 쉽게 관계를 정리하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사랑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고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과 서신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강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피를 그 구원의 증거로 말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피를 흘리신 것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당신은 피를 흘리셨음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 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괴테는 26살의 나이에 파우스트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며 어릴 적부터 문학과 예술을 가까이 접했습니다. 8살 때부터 시를 짓고 13살에 시집을 낼 정도로 조숙한 문학 신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0대 초반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20대 중반에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소재로 하여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되었는데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 지경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소설의 제목은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가 더 어울린다고 합니다. 그는 한 여성을 사랑했던 경험 가운데 인생의 깊은 고뇌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파우스트’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평생을 파우스트를 쓰고 또 썼다고 합니다. 그의 생전에 파우스트 1권이 나왔고, 파우스트 2권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만나서 서로 계약을 하게 되는데, 피로 계약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괴테가 성서에 통달한 증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도 피로 하고, 악마와의 계약도 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우스트를 통해서 괴테가 말하는 것도 성서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서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살린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욕망이라면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쾌락이 끝나면 함께 끝나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하는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괴테의 파우스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여백서원을 운영하시는 전영애 선생님의 영상을 보게 된 까닭입니다. 그는 서울대교수로서 세계적인 괴테학자입니다. 그는 괴테를 삶과 일에 대하여 사랑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괴테를 읽고 공부하고 그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영상의 말미에 이렇게 괴테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바르게 행하려는 자,
늘 기꺼이 뜻에 가슴에
진정한 사랑을 품어라”
이제 2023년이 가고 2024년이 밝아올 것입니다. 올 해는 아마도 우리에게 더 힘든 일들이 생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고 그 어디에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사랑이, 살린다’는 성서의 메시지와 괴테의 메시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바른 방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이 다짐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성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성서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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