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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 제2장 선물 / 새라 코클리 / 비아출판사낭독기도회 2023. 9. 6. 18:40
제2장 선물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2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3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을 밟아 늘이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7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8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9 전에 말한 일들은 이미 이루어졌다. 이제 새로 될 일을 내가 미리 알려준다. 싹도 트기 전에 너희의 귀에 들려준다." (이사야 42:1~9)
36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37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38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40 그 때에 예수께서는 "시몬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45 너는 내 얼굴에도 입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맞추고 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47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49 그러자 예수와 한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인데 죄까지 용서해 준다고 하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7:36~50)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이 이야기 중심에는 넘치는 선물을 바친 여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매력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그 중심으로 인도합니다. 그녀는 사랑과 감사,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에게 선물을 바칩니다. 이 선물이 수난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힙니다. 그녀는 옥함에 든 값 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낭비로 보입니다. 마음에 있는 열정 어린 사랑과 감사를 표현한 행동이지만 이러한 행동은 추문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이 이야기는 초반부에 등장합니다. 루가는 이 여인을 “행실이 나쁜 여자”라 말하며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마르코와 마태오의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요한의 복음서는 그녀가 라자로와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야라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이 여인을 죄인,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이렇게 의문의 여지를 남긴 채로, 곤혹스러운 사건, 어리석어 보이는 한 여인의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먼저 ‘선물’에 관해, 선물과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 역할의 상관관계를 성찰해 봅시다. 그러고 나서 수난 사건에 흐르고 있는 논리와 여인이 선물을 바친 행위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 봅시다.일상에서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일종의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걸(초콜릿, 일, 대출금) 주었으므로 너는 나에게 (지금, 혹은 언젠가) 뭔가를 줘야해’ 어떤 이들은 여기에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자리 잡은 기본 질서인 ‘교환’이라는 경제 질서가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질서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그 신세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계에는 무언가를 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고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종교생활을 할 때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교환에 기반을 둔 질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관대함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재량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질서에 머무르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은밀하게 십일조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장부에 얼마간 좋은 점수가 기록되었으리라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교환을 기초로 하는, 이와 같은 경제 질서에 잘 들어맞지 않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이러한 경제 질서에서 자율적인 행위자로 참여할 수 없을 때, 혹은 (예수가 살던 시대에 그랬듯) 그러한 역할을 맡을 수조차 없을 때 여성에게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남성들의 질서에서 남성들이 주고받는 품목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여성은 자신의 성을 교환의 매개로 삼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도 있습니다. 그 다른 길이란 바로 등가 교환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넘치는’ 선물을 함으로써 이 경제 질서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 혹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 경제 질서를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헤어진, 이제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넘치는 선물, 사랑을 봅니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넘치는 선물을 봅니다. 이와 비슷하게 자신을 향한 세인들의 시선, 평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여인을 통해 우리는 관능적인 사랑과 체제를 전복하는 행위가 역설적인 방식으로 만나 연결되는 모습을 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넘치는 선물을 주거나 바치는 행동은 우리에게 윤리적 혼란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은 무의미하고, 상처만 남기며, 낭비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의심합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넘어섭니다.
그렇기에 예수가 이 일을 칭찬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수난 전말, 예수는 여인이 바친 선물, 과도하고 낭비로 보이는 그녀의 사랑을 칭찬했습니다. 그녀가 바친 선물이 이해타산을 넘어선 선물, 축소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녀의 행위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녀의 행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과 용서에 대해 인간의 진실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제 질서, 선물, 교환 경제를 궁극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선물에 그녀는 응답했습니다.루가는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들을 배열했습니다. 그는 잠정적인 독자들, 대가를 치르면 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법칙 속에서 사는데 친숙한 이들, 경건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저녁 식사에 참석했을 때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이들을 의식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먼저 루가는 묻습니다. ‘자, 당신들의 논리로 생각해봅시다. 누군가 빚을 지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논리 말이지요. 그녀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으니 이제 그녀가 진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묻는 루가의 전략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습니다. 직후에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꾸짖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이 여인을 보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녀를 보고 그녀에게 배워라. 그녀가 행한 일이 너희를 가두고 있는 논리를 깨뜨리게 하라. 그리고 그녀가 바친 선물 속으로 흘러들어 가라.”
또 다른 곤혹스러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여인이 향유를 붓는 행동에는 관능적인 면이 있다는 점도 말이지요. 여인의 행위는 성적인 물물교환,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선물 교환 원리를 분명하게 상기시킵니다. 이때 루가가 섬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오나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여인이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 그의 메시아 됨을 확증하는 데 반해 루가의 복음서에서 그녀는 향유를 예수의 말에 붓습니다. 아리스터파네스Aristophanes, 플리니우스Plinius,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누군가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는 당시 이교들이 하던 사치스러운 풍습을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여인은 자신의 머리를 늘어뜨려 예수의 발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닦고 그곳에 입을 맞춥니다. 이 같은 행위는 명백하게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이렇게 유난스럽게 친말함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를 침착하게, 별다른 거리낌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를 보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는 여인의 행위에 담긴 극진한 사랑을 칭찬합니다. 또한 이를 행한 여인의 내면에 자리한 정결함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예수는 우리에게 연정(戀情)이라는 갈망이 실제로 향하는 곳, 그 진정한 종착지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갈망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과 만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5세기 초 시리아에서 활동했던 그리스도교 저술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e of Mopsuestia는 말했습니다.
향유를 발에 부음으로써, 그곳에 입을 맞춤으로써 여인은 우리 주님의 몸에 자신의 향기를 덧입히고자 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 하면서, 그분을 돌봐 드리고 싶어 했다. 그녀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그리하여 주님과 헤어지더라도 그분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여인의 머리카락, 여인이 바친 향유, 여인이 주님에게 전한 입맞춤은 한데 어우러져 교환 원리를 넘어서는 순전한 선물을 표현합니다.
예수가 부드러운 말투로 사랑을 담아 여인을 칭찬했을 때 (“네 죄는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그 여인이 바친 사랑,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사랑, 왜곡되고 뒤틀리나 모든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그 사랑을 향해 대답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예수의 수난이 지닌 의미로 들어갑니다. 진실로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곳, 커다란 대가를 치르며 바치는 선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넘쳐흐르는 사랑을 표현해야만 합니다. 오늘 날 가부장제 문화에 젖어 이러한 모습 보이기를 꺼리는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랑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식사를 나눈 뒤 그들의 발을 씻어 줌으로써 흘러넘치는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모든 교환 원리를 넘어서는 사랑이었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함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예수는 자신이 죽음 앞에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여인이 바치는 넘치는 사랑을, 그 달콤한 향기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애통함과 슬픔뿐 아니라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담은 선물을 예수에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지닌 의미를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가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듯이 우리는 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랑은 넘쳐흐르는 속성을 지닙니다. 사랑은 죽음을 넘어선 친밀함을 갈망케 합니다. 옥합이 깨지며 흘러넘치는 향유가 뿜어내는 풍성한 향기를 맡을 때 우리는 다시금 태초에 하느님께서 지으신 사랑의 포도밭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머뭇거리며,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하며 한 걸음 발을 내딛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의 넘치는, 망가진, 손상된, 잃어버린 사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면 예수는 그 모든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 모든 사랑을 자신의 수난을 여는 필수적인 요소로 삼습니다. 이는 새로운 일이며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는 우리가 바치는 선물을 ‘여성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지 않으며, 그 선물을 남용하지도 않고 남용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선물을 바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왜곡되지 않게 하면서도 우리를 모든 계산을 넘어선 ‘깊은 신비’로 인도합니다. 인간의 모든 사유를 넘어선 신성한 사유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옥함을 깨뜨린 여인처럼 예수의 발에 우리의 무기력한,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선물을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가 펼쳐지기를 기다리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은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예비한 여인을 칭찬하셨나이다.
이 여인을 따라, 당신을 향한 저희의 갈망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게 하소서.
그 갈망에 은총으로 응답해 주소서.
우리의 사랑은 왜곡되고 뒤틀려 있으나
당신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이를 새로운 삶의 재료로 길어 올리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어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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