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낭독기도회 2023. 8. 16. 18:59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 ‘성서에 나타난 기도’(김용운 목사) /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참포도나무교회)
예수의 삶 전체가 우리 인간들을 위한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가 배반당하시고 잡하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신 기도야말로 그의 생각과 삶 전체를 압축시켜서 표현하신 기도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활동하시던 중에 수많은 기도를 하셨다. 때로는 병자를 위해서, 혹은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기도를 하셨다. 때로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기 위해서,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를 하신 일도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위해서 몸소 기도를 하셨을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한 교훈도 주셨고 기도생활을 위한 훈련도 시키셨다. 그분 자신이 친히 보여주신 기도의 종류와 기도에 대한 태도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예수가 보여주신 기도의 독특성은 바로 그분이 가장 심각하게 드렸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종교를 보아도 거기에는 기도가 있다. 기도는 종교를 나타내 주는 가장 중심적인 면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기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면을 겟세마네에게 예수가 올리신 기도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부정(自己否定)을 바탕으로 한 기도였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해서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마태 26:36~46, 마가 14: 32~42) 모든 기도의 압권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와 각가지 종류의 기도를 보더라도 그 본질과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데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뜻을 이루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하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체로 기도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그의 희망 사항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기도는 사람의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도가 점점 발전하면서 그것은 결국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끝내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서에 나타난 기도들은, 종합적으로 보면 이것은 극히 자명(自明)하다. 바로 이와 같은 독특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는 기도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이다.
예수의 이 절박한 기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긴밀하고도 밀착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하고 기도를 드리지만, 이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인 바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는 데서부터 기도의 응답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예수의 기도는 응답되었다.(히브리 5:7)
예수는 같은 내용의 기도를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셨다. 결국 이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말 속에서 응답되고 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이런 기도가 어찌 간단할 수가 있으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에서” 터져 나온 기도가 아니었는가? “근심과 번민에 싸여” 기도를 하게 된 예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를 하셨다. 흔히 볼 수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그린 성화들은 너무나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온 세상 죄가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신 점을 새삼스럽게 되새겨 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하기고 기도를 부탁하신 예수는 그 부탁마저 이루어지지 않는 허전함을 맛보셔야 하셨다.
끝까지 철저하게 혼자서 몸부림 치셔야 했던 예수는 철저한 외로움까지 끌고 안으셔야 했다.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들조차 이 절박한 상황에서 부탁하시는 예수의 청을 들어드리지 못한 속에서 예수는 그야말로 “고군분투”하셔야만 했다. 괴로움에다 극도의 외로움마저 겹치는 순간이었다. 영혼의 번민과 고뇌가 더욱 가중되는 상황에서 예수는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
이런 처지에서 무슨 말을 많이 할 수 있으랴. 그분은 똑같은 말씀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셨다. 흔히 똑같은 내용의 기도가 되풀이되면 그것은 감정이 메마른 기계적인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같은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신 기도는 그런 기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무겁디 무거운 짐을 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오히려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진지하고 충실한 기도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바로 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미스테리와 고뇌가 서려 있다. 감히 아무도 범할 수 없는 비밀이다.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시지만, 예수는 같은 내용의 말씀을 되풀이하시면서 기도를 거듭하는 동안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일치되도록 몸부림을 치신다. “될 수 있으면 그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셨다”(마가 14:35) 제자들에게 이미 수난 예고를 세 번씩이나 하셨던 예수로서는 자신이 수난을 겪으실 것을 오랫동안 생각하셨고 마음 속으로 씨름도 하시며 번민하셨고 또 각오도 하셨던 분이지만,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미 오랫동안 각오를 하고 준비하시면서 그 잔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어 오신 분이지만 끝까지 자신의 뜻으로 그 잔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 주신다. 결코 “단순한 순교”가 아님을 보여주신다.
자기부정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매 순간, 매 사건 앞에서 자기부정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끝까지 그것은 새롭게 이어져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설렁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일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시작부터가 자기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신의 욕망이나 희망 또는 야심 때문에 하는 일로 변질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드렸다(요한 12:28). 그러면서도 예수는 같은 기도를 반복하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의 잔이 치워지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뜻이 점점 하나님의 뜻과 포개어져가고 있다.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하시는 말씀 속에는 이미 그 잔을 마시겠다는 뜻이 진하게 담겨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동떨어진 뜻이 아니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과 별개의 것인 독립적인 뜻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쓴 잔을 예수가 마셔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별도로 예수 또한 그 잔을 마시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뜻이 아니어야 했기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했으며, 끝내 예수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완전히 포개져서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는 하나의 뜻이 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세 번째 기도에서 예수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를 마치셨을 때 예수의 뜻은 완전히 아버지의 뜻 속에 스며들어서 아버지의 뜻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맥파디언(McFadyen)교수의 해석은 퍽 인상적이다:
“처음부터 예수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바랐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뜻은 그 잔이 치워져야 한다고 강렬하게 바랐다. 그러나 죽음에 이를 만큼 진지하게 예수가 기도하신 것을 통하여 예수는 그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데 도달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평온한 마음으로 승리자로서 한 제자의 배반과 군중의 광신주의와 시기에 가득찬 제사장들의 잔혹성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겟세마네에서 분연히 일어서셨다.”
이와 같은 기도에서 우리는 절실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던 예수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셨을 때의 그 믿음을 되찾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는 자신이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셨다. 죄 없으신 분이 죄를 걸머지시는 순간, 천진무구한 마음과 순수한 믿음으로 그는 “아빠”에게 호소하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가 가장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는 하나님을 “아빠”하고 부르시면서 외치셨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기도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러므로 우리를 앞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도 같은 기도를 하여야 할 것이지만, 그것도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끝없이 자기부정의 길을 가며 외쳐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엄청나고 큰 일이나 위대한 사건 앞에서만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닮을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우리의 삶의 모든 일 속에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하겠다.그러자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기도하기 전에도 깨어서 살피고 기도를 한 뒤에도 늘 깨어서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되어 가는 일들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과 변동에 따라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는 똑같은 기도를 깨어서 살피는 마음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되풀이해야 하겠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낭독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 / 제2장 선물 / 새라 코클리 / 비아출판사 (1) 2023.09.06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 (1) 2023.08.23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기도 (0) 2023.08.09 위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 느헤미야의 기도 (0) 2023.07.26 새해 아침에 드리는 기도 (1) 202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