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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낭독기도회 2023. 8. 23. 19:09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김용운 목사) /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참포도나무교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에, 흔히들 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종류와 형태의 기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도의 표현 양식 때문에 구분되는 것이지, 내용에 있어서는 기도가 그렇게 여러 가지 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보통 기도는 간구, 참회, 감사, 찬양, 중보, 결단 등등의 기도로 나누어진다고 보지만, 사실상 이 모든 종류의 기도도 결국 따지고 보면 단 한 가지 “간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표현을 하면서 기도를 하든지 간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일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도 흔히 이 점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기도라는 것이 “간구”라는 말을 벗어나서 다른 표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바로 이와 같은 점은 본디 기도가 무엇이냐를 뿌리에서 캐어 보아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기도는 모름지기 진실하신 그분과의 일치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는 만큼 그분에게서 오는 힘과 은총과 자비를 기다리는 자세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도는 간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사실상 성서에 나타난 모든 기도를 살펴보아도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구하는 것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마태 7:7),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마태 7:8),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요”(요한 16:2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다”(마태 21:22),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다”(마태 21:22),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 11:13),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보 4:2~3). 위에서 잠시 살펴본 본문들을 통해서 기도는 역시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참회도 감사도 찬양도 중보도 결단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가 된다는 말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더욱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것도 “연설”을 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기도는 오직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 중의 기도라고 하는 주기도문을 보아도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구하는 것”에 대하여 착각을 하거나 오해를 하고 있다. 구하는 것을 유치하거나 저속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구하는 것 그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의 내용이 그렇게 유치하거나 저속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생긴 느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진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달리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명확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 6:33).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진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덧붙여진 축복에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은 여기에 더 관심이 많고 실제로 더 끈질기게 집착을 하면서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하면”이란 말씀에 초점을 모아야 할 뿐 아니라 전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뜻을 집중시켜야 함을 느낀다. “그리하면”은 다름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구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만 하면 덧붙여 주시기를 약속하신 그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도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실상은 이 말씀을 우리의 구체적인 언어로 번역(해석)해야 그 뜻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기도 중의 기도로서 “구하는 것”에 대하여 원형적인 뜻과 모습을 보여주는 주기도문이 무엇을 구하되 “우리를” 위하여 구하는 것을 드러내 준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도 역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나” 속에 있는 “너”와 “너”속에 있는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구하는 것은 자연히 “남”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곧 남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된다.
이 때에 우리는 큰 “우리”이다. 비록 나에서 시작한 시작은 우리를 위하여 구하기도 하지만, 남을 포함한 우리이기 때문에 큰 우리가 될 수 있고, 이것은 더욱이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이기 때문에 큰 우리이며 “한 우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가 인간 세계에도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무엇보다도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분을 의존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믿고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밑바탕에 겸손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지니셨던 태도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물론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하지만, 이는 결코 “유치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뜻 앞에 전인격적으로 굴복하는 태도여야만 한다.이와 같은 태도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결국 그분과의 사귐 곧 친교로 이어진다. 이것이 곧 기도의 목적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에 우리가 구할 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너도 같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될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과 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게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자니까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갈망하면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처럼 그와 같은 사귐을 우리 사이에서 갖는 것이다. 그래서 신적인 사귐과 인간적인 사귐이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은 코이노니아(Koininia)이다. 친교와 협력과 참여와 감화, 그리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협력하며 그분의 일(선교)에 참여하고 그분의 감화를 받으며 하나님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코이노니아의 삶이다. 이와 같은 삶을 또한 인간적인 코이노니아의 삶으로 이어져서 일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끼리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사귐을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서로 친교하고 서로 협력하며 서로가 하는 일에 참여하고 서로 감화를 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끼리 이처럼 코이노니아의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거기에 계시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계시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의 관계가 연장되고 그러한 영역이 확대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코이노니아를 구하는 것이며, 코이노니아의 실체(the Reality of Koinonia)가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하며 그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찾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기도는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믿음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보아도 명백하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도 “나”라는 1인칭 단수가 아니라 1인칭 복수인 “우리”만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도 기도는 개인의 희로애락과 고민과 희망을 안고 씨름을 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찬양과 탄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의 뜻에 따라서 지배되기를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나누는 그 코이노니아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관용(寬容)하는 삶으로 이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이기심을 벗어나 서로를 겸손하게 관용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코이노니아의 실체를 이루는 것을 지상(至上)의 의무로 받아들이며 이를 끊임없이 수행해 가는 사람들의 믿음이 기도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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