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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문하는 믿음, 살아있는 신앙
    365일, 찬미와 기도 그리고 말씀 2025. 4. 27. 00:30

    질문하는 믿음, 살아 있는 신앙

    요한복음 20:2429

     

    1. 환대의 초청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주 함께 만들어 낸 새로운 길 위에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가 함께 개정한 정관은 단지 규칙을 고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을,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우리가 서로를 환대하는 방식을 새롭게 심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그 첫 번째 열매를 품은 자리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질문할 수 있는 믿음’, ‘기다릴 수 있는 공동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신앙’- 그 믿음 가운데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조용히 그리고 단단히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2. 당신의 믿음은 순도 몇프로인가요?

     

    오늘은 한 가지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믿음이란, 정말 의심이 없는 상태일까요?”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이란, 어떤 의심도 없는 상태일까요?” 아니면, “어느 정도는 의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가요?”, “만약 의심이 있다면 그 의심은 몇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나요?” 여러분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이 질문 앞에서 늘 멈춰섭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재주가 좋고 잘하는 것이 많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그 말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재주가 좋아서 새로운 일들을 겁도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새로운 일들은 제 믿음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사실은 재주가 좋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믿음을 곰곰이 들여다 보면 순도 100%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는 의심이라고 할만한 구석이 있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란 의심이 없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품고서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자동화된 믿음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부활을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걸 왜 못 믿지?” 저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증언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말씀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사건쯤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제 부활 신앙은 마치 자동판매기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처럼 너무 당연하고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믿음 그 자체로 본다면, 제 신앙은 좋은 믿음이기보다는, 자동화된 믿음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릴적부터 저는 교회의 따뜻한 품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었던 전도사님, 목사님,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저는 그 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믿음을 품었습니다. 그분들의 따뜻한 품으로 인해서 저는 저항없이 예수의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제 삶과 신앙은 제가 심은 씨앗이 아니라, 누군가 심어준 부활의 씨앗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스스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저를 품어준 이들의 신앙을 따라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요즘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는 정말 부활을 만난 사람인가?

    아니면 부활을 전해 들은 사람인가?”

     

    4. 비록 좋은 신자는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오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는 저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교회문화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못 자국을 보고,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마의 고백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지를 꺾을 수 있는 힘은 눈에 보이는 것일텐데 그는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분명 믿음의 차원으로 본다면 그는 좋은 신자는 아니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도마의 믿음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요즘에는 해보게 됩니다. 적어도 그는 사람들에 이끌려서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사람은 아니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5.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관습을 깨뜨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살아 생전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거절을 많이 당했으면 마태복음 116절에는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하기에는 함량미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믿기에는 걸림돌이 많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표현도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경한 표현으로 보이겠지만, 이건 미안하지만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도 자신의 제자인 도마에게 부활에 대해서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찾아오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아라.” 그렇게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아마 제가 예수님이라면, 그래, 니가 나를 못믿겠어, 고얀놈 너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도마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그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트라우마와 같은 심리적인 상흔이야 없으셨겠지만 어쨓든 예수님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6. 비로소 마음으로 보게 된 예수

     

    이윽고 도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그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가 눈으로 보고서야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준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야 믿게 되었습니다. 오백여형제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게 되었고, 야고보도 보고 난 뒤에 믿게 되었으면 스스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고백한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사실 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그들의 부활신앙의 기초가 되었음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제시를 우리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으니 그보다 한참 부족한 우리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때론 눈에 보이는 것을 숭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깨어나서 비로소 보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가 시력이 좋아져서 보이지 않던 예수를 보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보게 된 것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었다면 부활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승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눈으로 보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깨어났습니다.

    믿음이 눈을 열어준 것입니다."

     

    7. 의심이 아니라, 질문할 용기

     

    그래서 저는 어쩌면 도마가 품었던 마음은 의심이 아니라, ‘질문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말입니다. 물론 도마가 가졌던 질문은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거짓이 아니라, 참이었습니다. 적어도 못 믿고 안 믿는 것을 믿음으로 포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신 앞에서 솔직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신앙인에게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 믿으면서 억지로 믿는 척하는 것보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지만,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서는 이 솔직한 태도를 통해서 부활신앙의 정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충 안 믿으면서 믿은 척 했던 사람이 아니라, 지신이 믿지 않음을 대놓고 드러내놓은 도마를 통해서 부활신앙의 정수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어느 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인공지능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태도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비해서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태도라고 합니다. 그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먼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부모가 먼저 스스로 깨어서 공부하면서 스스로를 물어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태도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질문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깊이 공감을 합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사람들은 이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고 바둑기사들은 설자리가 없어졌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서 대학에서 바둑학과를 재학 중인 한 학생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알파고가 사람보다 더 바둑을 잘 둘지는 모르지만, 바둑의 재미는 느끼지 못하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멋지게 들렸습니다. 저는 이 삶이 바로 질문을 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다면 그건 분명 여러분의 신앙이 질문을 멈춘 까닭일 것입니다.

     

    8. 성숙한 신앙으로의 초대하는 문, ‘질문

     

    저는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던진 화두를 떠올리려고 합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합니다. 한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처럼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니, 눈이 보일 때는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들을 하게 되면서 세상은 혼란에 쌓이게 됩니다. 여기서 주제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보고 있는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맞느냐? 눈먼 것은 아니냐?라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이때의 눈뜸눈멈에 대한 기준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 뜬 사람이면 보아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있는데, 사람들이 눈을 멀게 되면서 최소한의 양심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살았다면 더 성숙한 신앙으로, 삶으로 나아갔을텐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정답을 찾아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되었지요?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세상이 이렇게 된데에도 교회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겠느냐?를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답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품은 자를 기다리십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 안에 숨겨진 질문을 꺼내보십시오. 그리고 그 질문 속에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주님,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질문을 허락하소서.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질문 속에서도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배우게 하소서.

    보지 않고도 사랑하고,

    보지 않고도 살아내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질문을 품은 사람들로 세상 속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걸음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게 하시고,
    우리의 고요한 질문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하시며,
    우리의 작은 손길마다,
    성령께서 새 생명을 피워주시기를 빕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깊은 품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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