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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카테고리 없음 2012. 4. 1. 00:24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
발제자 : 감리교아동교육정책위원회 안 준 호 목사(참포도나무교회)
가. 어린이의 삶에서 시작하는 교회교육 운동 / 문제제기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당연히 어린이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교육이 어린이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질 때, 교육은 반드시 어린이의 삶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어린이의 삶에서부터 출발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어른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생각의 틀 속에 교육적 주제들과 방법론이 모색되었으며, 또한 어른들과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서 교육의 모든 형식들이 도출되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어린이를 행복하게 하는 교육을 실행할 수 없다.
대부분의 교회교육현장에서 교육이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린이도 어른의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도록 교육되고 있다. 교육은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 신념들을 교육하는 기능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지평으로 도약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때문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교육은 철저히 새로운 세대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가운데 질문되어야 한다. 그런 질문을 묻는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는 ‘어린이가 그 중심이 되는 교육’이 어떤 구조로 질문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민 가운데 감리교 아동교육정책위원회는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이란 주제를 화두로 던지게 되었다. 이는 교육의 주체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다.
나. 어린이는 누구인가?
1. 어린이는 어린이다.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어린이 대하여 정보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루소는 “당신들은 유년기를 알지 못한다”라고 비난하면서 근대교육학의 길을 열었다. 그는 무엇보다 어른들에게 두 가지의 태도를 요구했는데, 하나는 유년기에 대한 심리학적-인간학적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성인의 목표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 즉 유용한 지식과 사회적 기능을 아이들 발달의 척도로 삼는 태도는 버리는 것이다. 루소의 이와 같은 지적과 같이 20세기에 들어서 꽃을 피운 ‘심리학’과 ‘인간학’의 발전은 어린이에 대한 한층 진보된 이해에 이르도록 도왔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서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과 접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는데, 이러한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로 서머힐과 같은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교들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학교와 교육패러다임에서는 기존의 어린이상에 반대하고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그 정의도 기존의 방식과 같은 진술이 아니라, ‘어린이는 어린이다’와 같은 방식의 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진술들이 교육의 틀 자체를 혁신적으로 변혁시켰다. ‘어린이는 어린이다’라는 진술은 어린이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며, 학습하며, 경험한다는 발견이며, 어른들과는 다른 어린이만의 고유한 성질이 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바로 교육은 어린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각성이다. 아직 우리는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들, 기존과 같이 어린이들을 어른의 시각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어린이에 대해서 어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별로 없다는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 것, 어른들의 잣대로 어린이들을 재단하고 정의내리는 것을 멈추는 것, 마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부터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어린이.
어린이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으로 묻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교회교육이라고 하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성서와 신앙전통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그 교육의 장이 다른 곳이 아닌 교회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어른들도 어린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어린이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데 방해되는 성가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성서의 어른들과 현대교회 성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에서도 어린이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 이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셨고 어린이들을 사랑하셨다.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연민과 긍휼에서 출발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어린이를 하나님나라의 모델로 칭하며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른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를 가르치려고 드는 어른들에게 도리어 어린이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의 어린이 이해를 적용하여 생각하면 어린이들은 단순히 우리가 가르쳐서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보존하고 간직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임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어린이’ 외에도 ‘누룩’, ‘새’, ‘낱알’, ‘등불’과 같이 작고 작은 것들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어린이’는 이 작은 존재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제시되었다. 예수는 이와 같은 상징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다. 어린이를 행복하게 하는 교회교육
1. 어린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교육환경.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기존의 교리와 신학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서 고백하고 이러한 교육과정을 통해서 어른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신앙인을 육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다보니 교회교육은 자연스럽게 어린이가 경험하고 있는 삶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어린이들로 하여금 교회가 제시하는 교육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원한다. 행복한 삶을 살아갈 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긍정의 마음을 갖게 되며 스스로 자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어린이들이 교회학교를 통하여 행복한 삶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면, 어린이들은 교회학교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은 낭만적이며 감상적인 표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린이들이 매일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삶에 비출 때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은 어린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행복하지 않은 삶에 대한 반작용 속에 교육의 성격과 과제가 분명해 진다. 어린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강요받고 있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들과 어른들로부터 교육기관에 보내지고 교육기관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교육되어 진다. 어린이들은 대부분의 교육기관들에서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교육을 받기에 급급하다. 초등학교 학생들만 하더라도 학교수업이 끝나면 학원을 순례하느라 제대로 놀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설령 놀 시간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학원을 가기 때문에 놀 친구도 공간도 없다. 어린이들에겐 그 무엇보다 놀이문화가 중요한데,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또한 선택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가하는 심각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교회교육도 사회교육과 그리 다르지 않은듯하다. 시험 때가 되면 교회학교 예배에 참석하는 어린이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시험을 대비해서 주일에 학원에 가는 어린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중고등학생들에게서 이런 현상들이 나왔는데, 이제는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어린이들에게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떤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히려 교회도 사회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을 펼치고 있다. 수능고사가 다가오면 많은 교회들이 현수막을 내걸고 수능학생들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벌이는데 학생들이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런 신앙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목회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이들의 행복한 삶은 보호받을 수 없다. 이 가운데 매년 수많은 어린이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잘못된 교육제도로 인해서 고통 받고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저 나약한 어린이들의 잘못된 판단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이런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성장하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주일예배를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비단 사회적 문제 탓으로만 치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사실 문제의 근원에는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교육에 있다. 교회학교가 부흥하던 7,80년대 교회학교는 그 어떤 교육기관보다 뛰어난 인프라와 교육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적어도 그 당시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교회는 동네에서 가장 근사한 교육기관이요, 삶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랑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마을사람들이 드물게 찾는 외딴 섬처럼 되어버렸다. 더 이상 그 어떤 설렘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공간처럼 방치되어 있다. 사실 교육 인프라 측면에서 교회학교는 그리 나쁘지 않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신자 늘리기와 외형 부풀리기에 힘쓸 것이 아니라, 작은 아이 하나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잘 섬기며 행복한 경험을 통해서 신앙인으로 자라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2. 행복의 해답,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선포
우리는 문제의 해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다. 삶의 모든 문제의 근원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삶의 조건들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통해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삶의 문제해결,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의 한복판에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메시지가 자리하고 있다. 예수는 역사 밖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쳤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이미 이 땅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나라를 보았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서도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어린이의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붙잡으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단지 언어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전체로 드려서 가르치셨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는 우리에게 좋은 선생님의 모델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걷는 길마다 풀이 돋아나고 죽어가는 생명들이 삶을 얻었다. 죄책감으로 주눅 들어 있던 사람들이 새 삶을 얻었고, 기뻐 뛰며 찬양하였다. 회색빛 도시에는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생명의 움이 터 올랐다. 그의 입과 손이 가리킨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메타포가 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언어가 표현하기 힘든, 언어 넘어 실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메타포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알아차리게 되었고, 부활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부활의 사건이야 말로 예수가 행한 가장 강력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듯 언어와 삶, 메타포가 어우러진 한바탕의 신명나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메타포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이 아닌 어린이였다.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어린이처럼 받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의 교육방법을 깨닫고 적용하게 될 때, 우리의 교육현장은 하나님 나라의 메타포와 능력으로 가득 넘치게 될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예수의 삶과 상징이 담지하고 있는 메타포를 발견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교회교육에 요구된다.
3.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교회교육
우리는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통해서 교회교육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제적 참여 안에서 우리는 교회교육의 전체적 틀을 구축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그저 언어로만 선포하지 않았다. 예수의 언어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삶을 변화시키는 기적으로 이어졌다. 예수가 제시한 상징과 메타포는 삶을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단순히 회당 안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과부의 주방 그리고 길거리, 우물에서도 자신의 가르침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통전적인 교육의 한 모델을 보게 된다. 교회교육이 단순히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에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바뀌게 될 때 어린이들은 그 곳에서의 경험들을 통해서 기독교의 복음을 통전적으로 습득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예수의 메시지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예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교육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는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문제)과 일상적이지 않은 장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요소들을 교육 현장에 적용하게 될 때, 우리는 지금 보다는 더욱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 자체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며 구원이 되는 교육이다.
라.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의 성격
1. 어린이다운 교육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육은 ‘어린이다운’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어린이다운’ 교육이라기보다 ‘어른다운’교육이었다. 어른들의 경험과 사고, 신앙고백의 틀 안에 어린이들을 끼워 맞추려 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 어린이들은 1980년대에 어린이 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어른들이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린이들은 어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어린이의 삶에서 시작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그 교육의 성격도 ‘어린이다운’교육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활기찬 생명력, 어른과는 전혀 다른 논리적 체계, 상상력과 직관력을 통한 세계인식이 ‘어린이다움’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어린이다움’을 교회교육 전반에 적용시켜 적용할 때, 비로소 교육은 어린이다운 교육이 될 것이며 우리를 교육이 좀 더 ‘어린이다운 교육’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2. 어린이를 존중하는 교육
지금의 교육현장에는 어린이를 경시하는 태도들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라는 지칭 안에 이미 어리고, 부족하고, 미성숙한 상태라는 어른들의 일방적인 편견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어른의 시각으로 볼 때 이런 편견을 갖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분명이 교육이라는 행위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시작되고 이어져 왔음은 분명하다. 교회교육의 목적도 어린이로 하여금 2천년동안 간직해온 교회의 신앙과 복음을 가르쳐서 지키도록 하는 것에 있다. 교육이 어린이를 가르쳐서 더 낳은 존재가 되도록 돕기 위해 행하는 어른들의 모든 시도를 포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때문에 교육행위의 주체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과 교육당국은 어린이에 대한 편견과 경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어린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를 존중하는 태도는, 어린이에게도 어른들이 배울 점이 있다는 깨달음이며, 어른과는 다른 어린이들의 경험, 인식, 학습방법, 생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그 특유의 본성이 있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빨리 성숙하고 지식을 깨닫고 어른이 되길 원하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다. 어린이들은 다만, 오늘이라는 시간만을 즐기고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맘껏 누리기 원할 뿐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어른들이 이와 같이 어린이의 경험과 고유한 성질을 존중하게 될 때, 교육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편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교육의 일방적인 수여자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가는 주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일단 어린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린이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우리에게는 낯선 어린이의 표현방식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어린이의 삶’을 어떠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어린이를 존중하는 교육은 시작된다.
3. 함께하는 교육
‘어린이’라는 단어는 ‘어른’이라는 단어와 한 쌍이다. 어린이와 어른은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교사만이 아닌, 모든 성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파울러는 유아기 초기에 이미 신뢰(trust)가 시작된다고 강조하는데, 어린이는 신뢰와 더불어 다른 사람 및 주변 세계와 만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신뢰의 토대 가운데 신앙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어린이가 신앙공동체 안에서 신뢰(trust)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이 다져야 할 기초석임에 분명하다. 이런 신뢰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화된 어른들과 교회성원들의 의식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어른들의 참여 가운데 어린이들은 따뜻함과 신뢰를 경험하게 되고, 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의 생의 기쁨이 어른들의 삶도 행복하게 만들 것은 자명한 일인데, 이 때 어른의 참여는 후원과 지지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부’로 이어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어른도 어린이와 함께 수업에 참여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고, 함께 작업에 참여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슈바이쳐는 ‘삶의 이야기와 종교’에서 “가족을 통한 종교적 사회화와 교회소속”의 중요성을 피력했는데, 이는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점이라 하겠다. 분명한 사실은 어린이들은 이와 같은 기초사회의 유대관계를 통하여 신뢰를 경험하게 되고, 그 토대위에 신앙적 발달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어린이와 어른, 아들과 아빠, 학생과 교사, 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교육의 구조, 즉 말하자면 함께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4. 삶을 위한 교육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도 자신의 삶에 관심이 있다. 그동안의 교회교육이 어린이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어린이의 삶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성서를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교회교육이 가르쳐온 교리들도 어린이가 경험하는 삶의 이야기들과는 거리가 멀다. 어린이의 삶을 존중하고 그 삶에 관여하는 방향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기만 해도 괜찮을 것인데, 그동안의 교회교육은 어린이들의 삶에 무지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자세까지도 취했다. 사실 이건 교회교육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교육 전반도 대부분 어린이의 삶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 다행한 것은 지난 몇 년 사이 우리사회 안에 ‘삶에 대한 공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그룹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동안 교육이 가르쳐온 지식보다는 삶에 대한 기술을 그 교육의 중심에 두었다. 이전에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바느질, 요리, 인문학수업, 여행, 대화등과 같은 수업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이 해체되기 이전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의 공부, ‘몸 공부’를 가족 안에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되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가장 기초적인 공부들을 배우지 못한 가운데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삶의 공부, 몸 공부를 배우지 못한 세대들은 실제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배움과 삶의 분리에서 나온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교회교육의 커리큘럼 속에 이와 같은 ‘삶에 대한 공부’를 포함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마. 교회교육의 재구성
1. 문제해결 중심 교육
교회교육이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 지금 어린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교육환경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서 빈곤층이 확대되고 있다. 결혼하지 않는 세대들의 증가와 이혼의 문제로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붕괴되고 있다. 이는 심각한 사회현상이 되었는데 이로써 어린이들이 가장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교회교육이 어린이들의 행복한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할 때 이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국교회 선교초기에는 교육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원선교와 의료선교에 힘썼으며, 한국전쟁이후에는 교회마다 고아원을 운영하며 고아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적어도 교회는 영혼의 구원만을 부르짖지 않았다. 영혼의 구원과 더불어 먹고 사는 문제에도 앞장섰다. 또한 70년대 이후에는 사회의 민주화에도 교회가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2012년을 지나는 한국사회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어린이를 둘러싼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신들의 과제로 안고 해결하려는 그룹들을 찾기 힘들다. 교회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하고 대처해 나간다면 교회는 다시금 이전의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다.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는 일, 경쟁을 부추기는 방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지식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교육 자체가 대안이 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대안학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학교가 하나의 분명한 대안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 어린이들의 놀이터 문제를 교회가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방과 후 갈 곳이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산적해 있는 교육적 문제들을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씩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네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조직과 인프라는 교회 밖에는 없다. 교회교육이 이렇듯 어린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힘쓸 때 교회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 과정 속에서 도출될 것이다.
2. 상징교수학의 적용
상징교수학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삶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교수방법이다. 상징교수학은 언어로 지시할 수 없는 ‘언어 넘어’의 실체를 설명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과학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 문학과 예술의 방법으로 종교적 교리를 전달하기에 아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상징교수학에서 ‘경험’과 ‘상징’은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경험’과 ‘상징’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상징이해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 언어와 논리가 다다를 수 없는 확고하고 명징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이는 또한 어린이교수학에서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데, 어린이의 삶에 밀접한 상징들과 경험들을 성서이야기와 연결시켜서 통합적인 앎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때 어린이들은 자신의 주체경험으로부터 교육에 참여하기에 자발적인 교육과정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교수학을 실제 교육의 현장에 적용할 때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할 수 있다. 교재의 구성과 교육과정 집필과정에서 상징교수학이 제공하는 큰 틀에 따라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식이 생겨날 수 있다. 또한 교육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교육공간의 변혁을 이끌 수도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경계를 약화시켜서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침에 참여하는 열린 교수법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교리, 신학적으로도 볼 때 탁월한 점은 언어중심의 교리와 신학이 언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린이들의 열려진 삶을 가둬놓는 반면에, 상징교수법으로 교리를 가르치게 될 때, 우리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의 새로운 측면들과 고백들, 진일보한 진술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결정되어진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묻고’ ‘생각하고’ ‘대답하는’ 연속적 과정을 통하여 더욱 풍성한 기독교신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교회교육
교회교육은 신앙교육이 되어야 한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서 그 신앙이 출발되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알맹이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적인 삶에 있다. 예수는 언어와 교리가 아닌 자신의 삶 전체로 가르쳤다. 제자들을 회당과 교실에 가둬놓고 고리타분한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서 일상의 삶을 교실삼아 가르치셨다. 예수에게 있어서 교실은 과부의 주방이었으며 어부들의 고된 삶의 현장인 선상이었다. 예수는 그렇게 만물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만약, 예수가 지금의 우리처럼 교회 안에서만 가르쳤다면 그와 같은 성과들을 올렸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와 함께 했던 그들의 경험,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복음전파로 지금까지 우리가 기독교신앙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교회교육의 맹점이 언어중심교육, 교리중심교육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복음은 언어로만은 전달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event)이었는데, 그동안 교회는 가장 손쉬운 언어만으로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어떤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의 삶과 사역이 우리에게 그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별한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아니고, 이웃들과 함께 하는 식탁교재를 통해서도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걸어가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가르쳤다. 또는 우물가에서 나눈 일상적인 대화를 통하여 예수는 여인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와 같이 간단하며 일상적인 일들,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삶의 소소한 에피소드들로부터 우리의 교육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초청하여 함께 밥을 먹는 일, 어린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함께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도 우리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만나는 삶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사물들이 하나님 나라의 상징, 메타포가 되도록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비루한 삶속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이제 부터는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을 결단하는 것이 예수메시지의 핵심이며 교회교육의 알맹이가 되어야 한다.
4. 교육공동체로의 재편
교회교육의 비극은 분업화에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러한 분업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분업화는 공장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다. 교사를 뽑아놓고 모든 교육을 교사들에게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교사들에게 교육을 결정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교회전통에 의하여 교육의 가이드라인이 암묵적으로 설정되고, 교사들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분업화형식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러한 교육현실 속에서는 교사들도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은 교육이 어린이들이 행복할리는 만무하다. 교회교육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행복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전체가 교육공동체로 재편되어야만 한다. 사실 교회는 그 자체로 이미 교육공동체이다. 주일마다 예수의 부활사건을 경축하며 모여 예배드리고 식탁교재에 참여한다. 이 자체가 교회가 교육공동체임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교육에 있어서는 교사들에게만 전담시킨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목사에서 평신도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 여기에 어린이들의 학부모들까지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출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은 단순히 교사들만이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고 모든 교회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가장 시급하고, 우선되는 과제다.
5. 교회력에 맞춘 교과편성 / 사계절의 특성 적용
교회교육의 가장 중요한 장은 바로 ‘예배’이다. 예배를 통하여 신앙을 깨우치고 학습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의 핵심은 예배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인 예배의 경우에는 교회력에 맞춰서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교회 안에 교회력에 대한 중요성이 많이 논의되고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교회교육만큼은 교회력과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라 하겠다. 물론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를 위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력을 교회교육에 접목하게 될 때 우리는 유려한 방식으로 신앙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교수학과 교회력을 접목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교재를 구성할 때도 교회력의 절기별로 나눠서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력과 더불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교육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에 비해서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이미 그 자체로 명징한 상징과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 교재를 교회력에 맞춰서 구성했다면, 그 구성 속에 사계절의 상징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바,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운동’의 제안.
그동안의 교회학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이십년간 우리 교회는 그리 좋은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어린이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천착하여 문제를 해결할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미 꽤나 진전된 모습들과 결과물들이 나왔다. 그에 비해서 교회는 내세워서 말할 수 있는 결과물과 움직임들을 찾아 볼 수 없다. 교제를 바꾼다고 교회학교가 바뀔 수 있을까? 좋은 프로그램을 채택한다고 교회학교가 살아서 움직일까? 좋은 강사들을 세워서 집회를 하여 교사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학교의 틀을 구조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제안하였듯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한 교제와 프로그램의 개발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서 작동하지 않는 교회학교를 새롭게 바꾸고자하는 운동의 차원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원점에서부터 다시 분석하여 앞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학교가 되도록 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 가운데 교회학교는 진정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로 변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 운동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본다. 첫째, 교회학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체 교회의 책임 있는 주체들이 함께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독일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회의 날’과 같은 프로그램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데,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의 날’ 혹은 ‘교회교육의 날’과 같이 이름을 붙여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를 위한 전담 프로젝트 팀의 구성 및 운영이 필요하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대안, 프로그램, 교육과 조직이 필요하다. 이를 전담할 팀을 꾸리는 일이 필요하다. 이미 현장에서 대안적인 교육운동 및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현장목회자들과 교육 담당자들을 중심으로 구성을 하여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방향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모델교회의 발굴 및 육성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교육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교회들, 즉 모델교회들이 필요하다. 현제 감리교회 안에서도 대안적인 교회교육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는 교회들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육성, 발전시켜서 모델교회로 세우는 일을 통해서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 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단의 정책적인 지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회학교 교육의 전체 틀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단의 정책적인 지원과 의지가 필요하다. 먼저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의 정책을 더 깊이 논의하고 구체화 시켜서 단계적으로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그림을 그려 놓고 전체 교회교육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그 방향이 ‘어린이가 행복한 교회학교’가 되어야 할 것은 틀림없다. 어린이가 비로소 교회학교 교육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세워져 갈 수 있는 학교가 되도록 제도와 교제, 프로그램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어떤 때보다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