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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치고 일하러 간 사람들설교 2026. 9. 27. 10:08
뉘우치고 일하러 간 사람들
마태복음 21:23~32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던진 상당히 저돌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질문을 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셨으며, 성전에서 눈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성전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을 읽으면서 ‘일과 권한’이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먼저 문제 삼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 있는지, 눈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이 고침을 받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보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느냐?”는 것을 먼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되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그러자 그들은 곤란해집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러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단순히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떤 대답이 자신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계산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에는 민감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지금 누구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아보는 데에는 둔감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그런데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처음의 대답은 잘못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고 결국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말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주 훌륭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이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질문이 완전히 바뀝니다. 처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던지시는 질문은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입니다.
한쪽에서는 일할 권한을 묻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실제로 일하러 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신약학자 크레이그 키너는 이 대목에 ‘가장된 순종과 뒤늦은 순종’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잘못된 대답을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행했고, 둘째 아들은 훌륭한 대답을 했지만 그 대답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키너는 여기에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말씀도 함께 연결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보다 그 대답 이후에 실제로 어떻게 살아갔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말이 ‘뉘우치다’입니다.
맏아들은 처음부터 옳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싫습니다”라고 잘못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뉘우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멜로마이’인데,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뒤에 가서 예수님을 넘겨준 유다에게도 이 말을 사용합니다.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신이 한 일을 뉘우쳤고 은돈 서른 닢을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니 유다에게도 뉘우침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맏아들과 유다를 나란히 놓고 보면 중요한 차이가 보입니다. 맏아들은 뉘우친 뒤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그의 뉘우침은 방향을 바꾸었고, 방향의 변화는 발걸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뉘우침은 그를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고 결국 절망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뉘우침에도 그 다음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후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맏아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뉘우쳤고, 그리고 갔습니다.”
어쩌면 이 짧은 두 동사 사이에 신앙의 중요한 비밀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한 번도 잘못된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자리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깊이 후회했느냐만이 아닙니다.
뉘우친 뒤에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처음부터 잘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싫습니다”라고 말했던 맏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믿었고 자신들이 가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을 보고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두려운 사람은 처음에 “싫습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가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농촌선교주일입니다. 그래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라는 말이 더욱 특별하게 들립니다.
농사는 말로 지을 수 없습니다. 농사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밭으로 나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풀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동시에 자신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씨를 심고 돌보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 씨앗 안에서 생명이 깨어나고 자라게 하는 것까지 자신의 몫은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농부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신앙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은 성실하게 하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촌선교주일은 우리가 농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날이 아니라, 농촌의 삶으로부터 몸으로 살아가는 신앙과 기다리는 신앙,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신앙을 다시 배우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에 일하러 간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일을 많이 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포도원은 아들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고, 그 일도 아버지가 맡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하러 간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맡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예전에 어떤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일을 하지 않고 얼마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환자가 지금 가진 돈으로 1년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자, 의사는 “그렇다면 1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일하고 싶어서만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힘들어도 살아가기 위해 일하고, 가족을 위해 일하고,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합니다. 그러니 충성이란 일이 언제나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지난 추석 연휴 동안 강릉 경포대에서 3박 3일 동안 커피차로 일을 했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가끔 “목사님은 자기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지 뭐”라고 말합니다. 물론 좋아서 시작한 일도 있고 일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일이 되면 힘듭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일이 좋아서 한 번도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힘들어도 그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여러분도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이 ‘아멘’이라고 대답할 만한 타이밍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사가 “할렐루야”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크게 대답하는 것을 좋은 신앙의 모습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아멘은 참 좋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이보다 더 훌륭한 아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언어로 바꾸면 “예, 제가 일하러 가겠습니다”라는 대답일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아멘했다면 사랑하러 가는 것이고, 용서하라는 말씀에 아멘했다면 용서를 시작하는 것이며, 약한 사람의 곁에 서라는 말씀에 아멘했다면 실제로 그 사람의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멘이라고 대답하고도 우리의 삶이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신앙의 언어와 우리의 삶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신앙은 설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독교는 사라지고 설교만 남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설교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침반을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확인했다면 이제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용서를 아는 것과 용서해 보는 것도 다르며, 섬김을 말하는 것과 누군가를 실제로 섬기는 것도 다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아멘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했던 아멘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백석동에서 20년이 넘도록 ‘1시간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족 이외에도 함께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과 자신을 지켜봐 주는 어른들, 그리고 넘어졌을 때 곁을 내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저는 좋은 문장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시간학교를 시작했고, 커피마을과 마을공작소, 마을콘서트 같은 활동을 하며 제가 살아가는 곳에 그런 마을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넘도록 그 일을 해보니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실제로 누군가에게 마을이 되어주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마을이 필요하지요”, “공동체가 중요하지요”라는 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실제로 자기 삶의 한 자리를 내어주고 한 아이의 곁에 오래 머물러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 아이에게 마을이 되어줄 것인가?”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저에게 맡겨진 포도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해야 했던 것은 마을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만난 아이들의 곁을 지키고 그날그날 저에게 맡겨진 씨앗을 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돌보는 것은 제 몫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까지 제 몫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포도원에서 성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열매를 만들어 가지고 돌아오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우리에게 맡겨진 포도원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정이고, 누군가에게는 일터이며, 누군가에게는 교회일 것입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돌보아야 할 한 사람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오랫동안 지켜야 할 작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크냐 작으냐가 아니라 누가 나에게 그 일을 맡기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일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포도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처음에는 “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뉘우치고 일하러 간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처음부터 잘했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부름받은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거절했던 사람도 있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갔던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부름받았느냐도 아니고 처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마침내 방향을 돌려 자신에게 맡겨진 포도원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교회가 아니라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할 것인지를 묻는 교회,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실제로 마을이 되어주는 교회, 설교를 많이 듣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라 들은 말씀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쉽게 아멘이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대신 우리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포도원은 어디일까요? 나는 그곳에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오늘도 아버지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처음에는 싫다고 말했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다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고, 그 마음이 우리의 발걸음이 되어 우리에게 맡겨진 포도원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아멘을 말로만 남겨두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는, 뉘우치고 일하러 간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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