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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따라오려거든
    설교 2026. 8. 30. 10:37

    나를 따라오려거든

     

    마태복음 16:21~28

     

    오늘부터 우리는 왕국절을 시작합니다. 왕국절이라는 이름은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비하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부활절에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을 기뻐하며, 성령강림절에는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과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왕국절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작 그 왕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왕국절을 시작하는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정말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대답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칭찬하셨고, 이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 조금 이상합니다. 그렇게 칭찬받았던 베드로가 불과 몇 절 뒤에서 엄청난 꾸중을 듣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는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고, 조금 전에는 반석이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을 연구한 W. D. 데이비스와 데일 앨리슨을 비롯한 학자들은 이 짧은 표현을 중요하게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와 같은 표현이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인 16장 21절에서 다시 “이 때로부터”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십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이 때부터”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면, 두 번째 “이 때로부터”에서는 이제 그 나라를 향해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가실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자 뜻밖에도 제자들 가운데서 반발이 나옵니다. 그 중심에는 조금 전 예수님에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까지 들었던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읽어서 그렇지 이 표현은 생각보다 상당히 강합니다. 여기에서 “붙들다”라는 말은 단순히 말을 걸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쪽으로 데리고 가거나 따로 붙드는 행동을 가리킬 수 있고, 개역개정이 “항변하다”라고 번역한 말 역시 원문에서는 ‘꾸짖다, 책망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을 가만히 그려보면 조금 놀랍습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오히려 예수님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적어도 고난받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길은 곧 자신들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분을 따라온 자신들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신다면 그분을 따라온 자신들에게도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더욱 고난의 예수가 아니라 영광의 예수를 바라고 또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그토록 강하게 막으려고 했는지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면 자신도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정말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면 그분을 따라가는 자신 역시 그 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 한 사람에게 일어날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길을 가시는가는 곧 그분을 따라가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다가올 십자가도 막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영광의 길을 가시면 자신도 그 영광을 따라갈 수 있지만,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면 자신 역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니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걱정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그분을 따라가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도 함께 들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사랑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예수를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제자가 스승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야 할 사람이 오히려 예수를 붙들어 세우고 “그 길로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참 무서운 말씀인데 저는 오늘 “사탄아”라는 말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순히 사라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굳이 “내 뒤로”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의 표현을 살펴보면 23절의 “내 뒤로 물러가라”와 24절의 “나를 따라오려거든”에는 같은 ‘뒤’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울리히 루츠를 비롯해 마태복음의 제자도에 주목하는 학자들의 연구를 따라 이 장면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단순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를 다시 제자의 자리로 불러들이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조금 선명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보다 앞에 섰습니다. 예수를 믿었고 사랑했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생각하는 길을 먼저 정해놓고 예수께 그 길로 가셔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야 할 제자가 오히려 예수를 붙들어 세우고, 조금 전까지 예수께 배우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을 가르치는 조금은 웃픈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이 베드로를 버리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다시 그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베드로야, 다시 내 뒤로 오너라. 너는 나의 길을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이제 모든 제자에게로 넓히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나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렇다면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신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에서 보면 오히려 내가 먼저 길을 정하고 예수께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에 가깝습니다. 내가 예수보다 앞서지 않고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바라보며 그분의 뒤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에 예수를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내가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왜 베드로가 그렇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고 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지셔야 할 십자가가 있고, 베드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베드로가 대신 질 수 없듯이, 베드로가 져야 할 십자가 역시 예수께서 대신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면서 베드로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전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했던 영화 〈편지〉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환유는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남게 될 아내 정인을 위해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 가운데 제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건너야 하는 자기만의 사막이 있어. 그 사막은 자기 혼자만이 건너야 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곁에 있어 줄 수 있고 손을 잡아줄 수 있고 함께 울어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살아내야 할 삶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기 발로 건너야 하는 사막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그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에게 저마다 자신이 건너야 하는 사막이 있듯이,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주했던 십자가와 그 모양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도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를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하는 길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제가 예수님을 믿기에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백석동 13블럭에서 커피마을과 마을공작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여러분을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제가 져야 하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때문에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서로 다를 수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져줄 수 없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를 내가 대신 정해줄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남의 십자가를 찾아서 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뒤 곧바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예수께서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앞서 걸어가시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십자가 없는 예수를 바라는 길도 아니고, 예수에게만 십자가를 지우고 나는 그 뒤에서 영광을 기다리는 길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에 나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이 더욱 깊게 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야, 내 십자가를 막으려고 내 앞에 서지 말고 다시 내 뒤로 오너라.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테니, 너도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물으십니다. 결국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원했던 것을 내려놓으면서도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며 마침내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왕국절을 시작하는 오늘 이 말씀은 우리의 자리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왕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며, 예수가 왕이시라는 고백은 결국 내가 왕이 아니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한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목회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고, 목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리는 예수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에서 예수보다 더 중요한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을 여전히 안고 살아갑니다. 아니, 때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굳이 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어려움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선택을 해야 하고,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을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외면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사람의 곁에 머물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기보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왕국절을 시작하는 오늘, 왕의 자리는 예수께 드리고 우리는 다시 그분의 뒤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고 따르기에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대신 져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혼자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먼저 걸어가신 예수께서 계시고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고백이 이것이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높아지시고 나는 낮아지게 하소서. 내가 앞서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소서.”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는 지금 예수께 나를 따라오라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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