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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은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설교 2026. 9. 13. 10:46
그래서 당신은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
마태복음 18:21~35
성령강림 후 제16주 · 교회연합주일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던진 아주 현실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지난주 우리는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찾아가 이야기하라고 하셨고, 그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되묻습니다. 사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람이 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용서했는데 또 그러고, 다시 기회를 주었는데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베드로의 질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 카운팅하는 남자
베드로는 “몇 번이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라고 숫자 하나를 제시합니다. 성서에서 일곱은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나타내는 숫자로 자주 사용되니, 그의 질문은 어쩌면 “제가 할 만큼 충분히 용서했다면 그다음에는 포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일곱 번’보다 그 앞에 있는 ‘자꾸’라는 말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베드로에게는 이 질문을 하면서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으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18장이 제자들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관계도 늘 평화롭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으며, 가까이 지냈던 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어느 순간부터 횟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알아?”라고 말하면서 지난번 일과 그 전의 일을 하나씩 꺼내 놓습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횟수는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횟수는 참 잘 기억합니다. 마치 마음속에 장부 하나를 만들어놓고 상대방의 잘못을 하나씩 기록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490번째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부터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용서를 숫자로 계산하려는 베드로의 방식 자체를 흔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라멕의 이야기가 겹쳐 들립니다. 라멕은 자신을 해친 사람에게 일흔일곱 갑절로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크게 되갚고, 그러면 상대방도 다시 더 크게 갚으면서 상처가 상처를 낳고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아온 오래된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방향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라멕이 복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확대했다면, 예수께서는 용서를 셀 수 없을 만큼 확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라고 말씀하시며 이야기를 하나 시작하십니다.
2. 카운팅을 없앤 왕
베드로가 지금까지 계속 셈을 하고 있었으니, 예수께서도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베드로가 셈을 하고 있으니 예수께서 정말 셈을 하는 왕을 등장시키신 셈입니다.
왕이 장부를 펼쳐보니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정확한 금액을 계산해보라고 이 숫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는 갚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이렇게 터무니없이 큰 액수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종은 왕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갚을 수 없는데도 다 갚겠다고 합니다. 너무 절박하면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는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왕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왕은 상환기간을 늘려주거나 이자를 깎아준 것이 아닙니다. 만 달란트를 천 달란트로 줄여준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 종을 가엾게 여기고 빚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왕은 숫자를 줄여준 것이 아니라 카운팅 자체를 끝내버렸습니다.
저는 여기에 복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이 빚을 탕감받은 것은 그가 갚을 능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은 단지 왕이 “그를 가엾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종의 자격에서 시작되지 않고 왕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도 빚을 다 갚아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잘 살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것을 탕감받고, 다시 기회를 얻고, 셀 수 없는 자비를 입으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 다시 카운팅을 시작한 남자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왕궁을 나서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조금 전까지 왕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고 말합니다.
백 데나리온도 작은 돈은 아닙니다. 노동자가 상당한 기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니 분명한 빚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 달란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이 작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신은 실제로 아프고, 누군가의 말은 오래 마음에 남으며, 폭력과 억압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당신도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그 정도는 그냥 잊어버리세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그 잘못을 지적하여라”고 말씀하신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폭력을 계속 허용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관계를 반드시 이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관계에는 거리가 필요하고, 어떤 잘못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며, 깨어진 신뢰가 다시 세워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용서는 백 데나리온을 0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 데나리온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내가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바로 그것을 잊었습니다. 조금 전 왕 앞에서 “참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그 사람 앞에 이제 동료가 엎드려 “참아 주게”라고 말합니다. 조금 전의 자기 모습이 지금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왕은 장부를 없애버렸는데, 종은 다시 장부를 펼쳤습니다. 조금 전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얼마나 큰 자비를 받았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잔인함 이전에 망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왕은 나중에 그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저는 오늘 말씀에서 이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서의 출발점은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많고 너그러운 사람인가에 있지 않고,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이라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를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용서는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용서하라”는 말씀을 피해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용서의 힘과 출발점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 번은커녕 두세 번만 반복되어도 마음속 장부를 꺼내 들고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주시며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용서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씩 용서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4.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어
여기까지 말씀을 따라오고 나면 저는 처음에 베드로가 했던 말 가운데 ‘자꾸’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목사님, 그 사람이 자꾸 그래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요”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실제로는 일곱 번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횟수가 적다고 해서 상처가 작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번의 말이나 행동도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속에서 사용하는 ‘자꾸’라는 말이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몇 번의 갈등이 쌓인 뒤에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같은 잘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모든 갈등이 반드시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은 서로의 성향이 다른 데서 생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솔직함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 수 있고, 한 사람에게는 배려라고 생각한 침묵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나와 다른 것까지 상대방의 잘못으로 마음의 장부에 기록합니다.
또 어떤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경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서로를 미워하게 할 수도 있고, 한 사람에게 지나친 책임을 맡겨놓은 뒤 그 사람이 지치고 무너지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믿음만 탓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들고 있는 장부를 한번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정말 그 사람이 나에게 일곱 번이나 죄를 지은 것일까요? 내가 죄라고 기록한 것 가운데 단지 나와 다른 것은 없을까요? 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우리가 함께 만들어놓은 관계의 문제는 없을까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함께 바꾸어야 할 구조의 문제는 없을까요?
물론 잘못을 흐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폭력은 폭력이라고 말해야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며, 착취와 억압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을 죄라고 부르고, 모든 차이를 잘못이라고 부르며, 모든 갈등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입니다. 오늘 함께 읽는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자매를 심판하느냐?”
어쩌면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너무 빨리 틀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갈등이 생겼을 때 한 사람만 탓하기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들어놓은 관계와 구조까지 돌아보며, 분명한 잘못 앞에서는 진실을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교회가 하나 되어 살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잘못이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의 질문도 조금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오히려 “그런데 나는 몇 번이나 용서받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아마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자비를 받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도 그렇고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부족함을 참아주었고, 누군가는 우리의 실수를 알면서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으며, 누군가는 우리가 했던 말을 마음에 묻어두고 다시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기 시작하면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우리가 하는 말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향한 예수님의 자비를 오래 바라보다 보면 그 말에서 아주 조금 더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어.”
그 사람이 잘했다는 뜻도 아니고, 내가 받은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사람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실수하고 잘못 판단하며, 자기 안의 상처와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오래 예수님 앞에 서 있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바라보면서 그 종이 기억했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도 조금 전까지 저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모두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그의 잘못 하나로 끝내버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예수께서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말씀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을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으키시며,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지고 다시 마음속에서 숫자를 세기 시작할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를 더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세고 있지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횟수는 이미 셀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베드로가 던졌던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
아마 그 답은 숫자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몇 번까지인지 계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자비를 기억하며 오늘 한 번 더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용서의 삶은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자비를 기억하며 우리도 사람을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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