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잃어버린 교회, 사람을 찾는 예수설교 2026. 9. 6. 10:35
사람을 잃어버린 교회, 사람을 찾는 예수
마태복음 18:15~20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자주 읽혀 왔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 이야기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마지막에는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일종의 지침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흔히 교회의 권면과 징계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렇게 읽는 것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 생길 수 있고,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가 있으며,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방향이 보입니다. 이 말씀의 관심은 어떻게 사람을 밀어내고 배척할 것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과 잘못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인 15절부터 읽기보다 마태복음 18장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제자들의 관심은 ‘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누가 더 중요하고, 누가 더 인정받으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사실 하늘 나라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정말 궁금했던 것은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더 큰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으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은 큰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작은 사람을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큰가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누가 공동체 안에서 작아지고 있는지, 누가 쉽게 무시당하는지, 누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은 것이니 1퍼센트의 손실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목자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보다 지금 사라져버린 한 마리를 바라보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끝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바로 다음에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순서를 놓치면 이 본문을 바르게 읽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갑자기 등장한 교회의 징계 절차가 아니라, 작은 사람 하나를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가라는 앞선 관심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약학자 엘리자베스 존슨도 바로 이 문맥을 중요하게 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사람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마지막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잃어버릴 뻔한 한 사람을 다시 얻는 것, 끊어질 뻔한 관계를 다시 이어가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을 이야기해야 할 때도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얻고 싶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말하는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디에서 출발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공동체는 사람을 쉽게 정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람을 다시 얻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명기의 두세 증인 원칙을 끌어오신 것으로,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누군가의 잘못을 확정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사람이 더 들어온다는 것은 단순히 내 편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판단 역시 검증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상황을 정말 바르게 보고 있는지, 내 상처 때문에 상대방을 실제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나에게도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없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제 교회에 말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8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교회가 받은 권세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약학자 스탠리 손더스는 이 말씀을 읽으며 중요한 경고를 합니다. 공동체가 판단할 때 그 안에는 언제나 권력관계와 이해관계가 개입될 수 있으며, 교회라고 해서 그런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교회이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결정한 것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처럼 말하며, 우리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결정했습니다.”
“기도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말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사용되고, 힘없는 사람의 입을 막는 도구가 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에서 ‘권세’보다 먼저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에 매고 푸는 권세가 있다는 것은 마음대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 하나가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더 두렵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바로 앞에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을 통해 한 사람을 얻고 있는가, 아니면 작은 사람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는가?”
17절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물론 공동체에는 분명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계속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누군가를 미워하고 완전히 버릴 수 있는 허가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께서는 세리와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마태 자신도 세리였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밖에 있다고 판단할지라도 예수께서는 바로 그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다가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사람을 잃어버린 교회, 사람을 찾는 예수’라고 정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는 지난 역사 속에서 사람을 얻기보다 사람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질서와 평안, 지도자의 권위와 다수의 안정을 지킨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한 사람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를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작은 사람을 가운데 세우셨고,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어도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한 우리 역시 예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 역시 사람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나누는데, 그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교에 들어갔는지,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무엇을 이루어냈는지를 가지고 사람의 크기와 가치를 판단합니다. 좋은 성과를 얻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그렇게 중심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사회의 엘리트와 주류가 됩니다.
물론 성과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성과와 사람의 가치를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과를 얻은 사람은 더 가치 있는 사람처럼 여기고,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은 뒤처지고 부족한 사람처럼 여깁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그래도 가치 있는 사람인가?”
저는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깊은 허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공동체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마저 성과를 가지고 사람의 크기를 나눈다면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은 교회에서도 다시 밀려나게 됩니다. 무엇을 많이 해낸 사람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교회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면 교회도 결국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작은 사람을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저는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런 성과를 내세울 수 없어도 앉아 있을 자리가 있고, 실패했다고 해서 존재의 가치까지 부정당하지 않으며,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김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사람이 적게 모인 예배나 기도회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물론 그렇게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이 두세 사람은 단순히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하며,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내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였다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모였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큰 사람보다 작은 사람을 바라보고, 권세를 자랑하기보다 책임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쉽게 정리하지 않고 한 사람을 다시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세상이 성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때에도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께서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다시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그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느냐?”
지난주 우리는 너무도 끔찍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네팔과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에서 빙하 붕괴로 시작된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고, 네팔에서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 명이 여전히 실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마음 아픈 것은 네팔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0.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은행 역시 네팔이 기후변화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음에도 그 피해에는 매우 취약한 나라라고 지적합니다.
기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거의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피해의 최전선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작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의 원인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 피해를 가장 먼저 당하는 사람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지킬 힘이 적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형편도 되지 않으며,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작은 자’란 바로 그런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내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자신들이 결정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 작은 사람 하나를 바라보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다고 계산하지 않으시고, 사라져가는 한 사람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단지 교회 안에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만을 묻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그냥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세상이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찾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사람을 잃어버린 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길에서 우리 역시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 (0) 2026.09.20 그래서 당신은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 (1) 2026.09.13 나를 따라오려거든 (0) 2026.08.30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하느냐? (0) 2026.08.23 마침내 믿음을 만나다! (0)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