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
    설교 2026. 9. 20. 10:46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

    마태복음 20:116 (성령강림 후 제17·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뽑기 위해 이른 아침 장터로 나갑니다. 당시 하루의 노동이 시작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아마 오전 여섯 시쯤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몇 사람을 만나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합의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전 아홉 시에도 주인은 다시 장터로 나갑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른 아침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인 듯합니다. 그들이 늦게 와서인지 아니면 충분한 일자리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번역 성경은 그들이 장터에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들을 일자리로 초대했습니다.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맨 처음 고용한 사람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어쩌면 이 얼버무림이 오늘 문제의 화근이 되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주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오에도 장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다시 오후 세 시에도 또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을 만나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사람을 많이 뽑는 것을 보면 포도원에 일꾼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후 다섯 시가 되었는데도 주인은 장터에 나가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나면 하루의 일이 끝납니다. 요즘에는 목수들도 오후 네 시쯤이면 일을 마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시간에 다시 일할 사람을 구하러 간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신약학자 존 T. 캐럴은 여기에서 사용된 빈둥거리다라고 번역된 말을 단순히 게으르다는 도덕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일이 없는’, ‘일하지 않고 있는’, 다시 말하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이 사람들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도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분명 그들이 빈둥거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답변은 꽤나 합당한 말이기도 합니다. 일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선택해주지 않아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빈둥거리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후 다섯시까지 시장을 떠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것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일꾼으로 불러주었습니다. 아마도 포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들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은혜로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을 마지막 순간에라도 불러준 것이니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녁이 되었고, 드디어 모든 일꾼들이 기대하던 카운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루의 품삯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급여 지급이 진행되었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받으러 나오라고 말합니다. 가장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을 가장 먼저 불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아침부터 일했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계산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은 당연히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도 그들이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어 품삯을 받아보니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그들의 불평이 기록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일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루 종일 일했고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침에 그들은 이미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주인과 합의했습니다.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주기로 한 돈을 덜 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아침에 한 데나리온에 감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합의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자신들이 합의했던 바로 그 한 데나리온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아침에도 한 데나리온이었고 저녁에도 한 데나리온인데,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왜 화가났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받았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나니, 자신이 받은 한 데나리온이 갑자기 적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들이 불평한 것은 왜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습니까?”가 아니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셨습니까?”

     

    그것이 그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신약학자 클라인 스노드그래스는 이 비유를 바로 앞에서 베드로가 했던 질문과 연결해서 읽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도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버렸고 얼마나 따랐는지, 그래서 무엇을 받을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도원의 일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일했고 저 사람은 얼마나 일했는지, 그러니 나는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는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한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일했던 사람이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아무 일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는데 정말 잘됐습니다. 당신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군요라고 축하해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주인에게 저도 아침에 불러주시고 저 사람도 늦게나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포도원이 더 풍성해졌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답게 끝났을까요?

     

    사실 저는 그것이 가장 좋은 엔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부름받은 사람이 자신을 불러준 것에 감사하고, 나중에 부름받은 사람도 함께 축복하며, 그 사람이 들어와 포도원이 더 풍성해진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그렇게 아름답게 끝나지는 못했습니다. 먼저 부름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부름받은 사람을 축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후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결국에는 주인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주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어쩌면 이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일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으니, 집에 먼저 있었던 형도 함께 기뻐하고 동생을 축하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큰아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이 말은 무슨뜻인가요? 죽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왔더라고 큰 아들을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모른척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두 이야기에서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 곧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탕자의 귀향에서 큰 아들의 아버지와 주인을 대하는 태도말입니다.

     

    포도원의 일꾼은 나는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라고 말하고, 탕자의 큰아들은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오래 일했고, 실제로 오랫동안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오래 일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중에 온 사람을 축하하지 못하고, 내가 오래 아버지 곁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돌아온 동생을 기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먼저 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가장 큰 위험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었다는 사실이 감사했을 텐데, 포도원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불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떻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평불만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전의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장터에 남아 있던 사람이 가장 나중에 포도원으로 들어왔는데, 정작 품삯을 받을 때가 되자 주인은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반대로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와 하루 종일 일했던 사람들은 가장 나중에 품삯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갑자기 등장한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야기 안에서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도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신 뒤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포도원 주인을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이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은 단지 늦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는 따뜻한 하나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사람을 불러주시고,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앞으로 세우시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순서를 뒤집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역전의 신비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가르쳐야 할까요?

     

    세상은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먼저 되라고 가르칩니다. 남보다 먼저 가야 하고, 먼저 선택받아야 하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아이들이 그것보다 한 가지를 더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되었을 때 나중에 온 사람을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불림받았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사로 기억하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당신도 불림받았군요. 참 잘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오랫동안 포도원 안에 있었던 우리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지, 얼마나 많이 봉사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습니다라는 고백보다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라는 말이 더 커지기 시작한다면, 우리 역시 포도원의 첫 일꾼이나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던 큰아들의 자리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까 상상했던 그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마지막에 온 사람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합니다.

     

    당신도 불림받았군요. 참 잘됐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인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저도 불러주시고 이 사람도 불러주셨군요. 오늘 포도원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먼저 왔는지, 누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만 계산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불림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포도원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오후 다섯 시의 장터로 나가십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불러 우리 곁에 세우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산이 아니라 축하일 것입니다.

     

    당신도 불림받았군요. 참 잘됐습니다.”

     

    먼저 부름받은 것을 감사하고, 나중에 부름받은 사람을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포도원은 그만큼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이것이 오후 다섯 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전의 신비일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전의 신비에서 먼저 불림을 받고 맨 마지막까지 함께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