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저는 목재를 사기 위해 자주 가는 목재상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사장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고, 오히려 일부 개신교인들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만 서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 갈 때마다 그분에게 좋은 인상을 받습니다.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해오셨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늘 친절하게 대해주십니다. 지난주에도 목재를 사러 갔다가 그곳의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한 문장을 보았습니다.
“지나온 삶은 행복이고, 살아갈 날은 축복이다.”
사장님께서 직접 써놓으신 글이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문장도 아니었고 하나님이라는 말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는 그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원망하기보다 행복이라고 받아들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축복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문장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물론 그분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내면을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삶 앞에서 제 믿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지나온 삶을 정말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축복이라고 믿고 있는가,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오늘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너무 쉽게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된 믿음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한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마태는 그녀를 굳이 “가나안 여자”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그리스 여자라고 소개하지만, 마태는 오래된 이름인 ‘가나안’을 다시 불러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은 단순한 지역이나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오래된 경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신약학자 제임스 보이스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서 이 이야기를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된 놀라운 믿음의 이야기로 읽습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믿음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이야기의 중심에 세워놓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참 뜻밖의 고백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소리쳤고,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빠져 예수님께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가까이에 있던 제자에게서는 작은 믿음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믿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외침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는 그 장면을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할 뿐, 왜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기도 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을 들으시고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지만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을 먹이신 뒤 겨우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셨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돌아오자 다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생각하고 기도하며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또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찾아온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한 편의 탄원시가 시작되다
그런데 이 여인이 겪는 일을 천천히 읽다 보니 저는 시편의 탄원시가 떠올랐습니다. 신약학자 게일 오데이는 이 여인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오랜 탄원 전통과 연결해서 바라보는데, 그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여인이 지나가는 길과 시편의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이 놀랍도록 겹쳐 보입니다.
시편의 탄원자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시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그 침묵을 견디는 동안 사람들의 조롱과 수모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시편 22편의 시인은 급기야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고통과 사람들에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받는 모멸이 한 사람의 삶 안에서 겹쳐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겪는 일도 그와 닮아 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자 제자들은 그녀의 고통을 들으려 하기보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다시 간청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침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말이 돌아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 우리의 언어감각으로 들어도 충분히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딸의 고통을 짊어지고 찾아왔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침묵을 만났으며, 제자들에게는 떠나보내야 할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을 자녀가 아니라 개의 자리에 놓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면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시편의 탄원자가 겪었던 하나님의 침묵과 사람들의 거절, 수치와 모멸이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편의 탄원시가 정말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탄원자는 하나님께 항의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탄식하면서도 그 침묵을 깨뜨려 달라고 다시 하나님께 말하고, 심지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망의 말조차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읽었던 시편 42편의 시인도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어 눈물이 음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영혼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눈물도 그대로이고 사람들의 조롱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만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셔도 다시 말하고, 제자들이 밀어내도 돌아가지 않으며, 자신에게 모멸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듣고도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마지막 말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저는 이 여인의 ‘그러나’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라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리한 말대꾸가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는 탄원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족적으로는 가나안 사람이고, 종교적인 경계로 보면 밖에 있는 사람이며, 제자들의 눈에는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걸어온 길과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이미 시편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고 사람들의 수모를 견디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시편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 밖에 있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이미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작은 부스러기, 큰 믿음
저는 이 여인의 대답 가운데 또 하나의 단어에 마음이 머뭅니다. 바로 ‘부스러기’입니다.
이 여인이 바랐던 것은 어쩌면 정말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은혜였습니다. 그녀는 식탁 전체를 달라고 하지 않았고 자신을 자녀의 자리에 앉혀 달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자신에게 허락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참 역설적입니다. 그녀가 구한 은혜는 작았지만, 그녀가 믿은 자비는 컸습니다.
그녀는 그 작은 부스러기 하나에도 자신의 딸을 살리고도 남을 만큼 주님의 자비가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자격을 크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식탁을 크게 생각한 것입니다. 작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그것이 주님의 상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어쩌면 믿음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큰 것을 요구하는 능력이 아니라, 작은 은혜 안에서도 하나님의 큰 자비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크고 분명한 기적보다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은혜로 하루를 견뎌야 하는 날이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건네준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다시 힘을 얻기도 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다시 일어날 작은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말하는 부스러기는 단순한 위로나 작은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였습니다. 그녀가 믿었던 것은 부스러기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가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비라면 작은 부스러기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작은 부스러기를 구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큰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사람아”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믿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침묵과 거절과 수치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만나셨지만 좀처럼 믿음을 만나기 어려웠던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며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마침내 믿음을 만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믿음이 있고 교회 밖에 있으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에게서 작은 믿음을 보셨고, 모두가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가나안 여자에게서 큰 믿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지난주 목재상에서 보았던 문장이 다시 생각납니다.
“지나온 삶은 행복이고, 살아갈 날은 축복이다.”
그분에게 기독교적인 의미의 믿음이 있다고 제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장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나안 여인에게 믿음은 자신의 삶이 편안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딸은 고통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을 밀어냈으며, 예수님마저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거절을 경험했을 때에도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믿음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닫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계속 하나님께 말을 걸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비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시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알 수 없고, 기도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확신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은혜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은혜 안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만나신다면 우리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가나안 여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주님의 자비를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며 가나안 여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들려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놓치지 않고, 그 작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큰 자비를 바라보며 끝까지 주님을 향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