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설교 2026. 8. 8. 18:57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14:22-33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베드로도 그분을 바라보며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그를 붙잡으시며 물으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자들에게 시선을 둡니다. 왜 믿음이 없었을까, 왜 바람을 바라보았을까, 어떻게 하면 풍랑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을까. 이런 읽음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가 오병이어 사건 직후에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풍랑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물에 빠졌는가를 묻기 전에,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보내셨는가. 제자들이 왜 두려워했는가를 묻기 전에, 예수님은 왜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 홀로 산에 올라가셨는가.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하자,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보다 먼저 산 위에 홀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 혼자 외딴 곳에 서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세례 요한이 참혹하게 죽자,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반응을 짧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거기에서 떠나,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14:1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내진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었다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걸어간 길은 곧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셔야 할 길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함께 바라보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거기에서 떠나,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는 이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몰려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긴 하루가 끝난 뒤,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곧’, ‘재촉하여’, ‘헤쳐 보내신 뒤에’, ‘따로’, ‘홀로’. 이 표현들은 모두 비로소 하나님 앞에 홀로 서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알렉산더 발메인 브루스는 이 장면을 두고 “예수께서는 마침내 혼자가 된 것을 반겼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가던 사람은 떠났고, 제자들은 아직 그 길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셨습니다. 그 고독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고독이 아니라, 다시 그들에게 걸어가기 위한 고독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숙고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산 위의 시간이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한 말씀을 조금 다르게 들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고 에이미.” 그 이야기는 잠시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2. 재촉하여 보내실 때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저는 이 ‘재촉하여’라는 단어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마태는 그냥 보내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굳이 재촉하여 배에 태워 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이제 전국구 인물이 되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고, 그만큼 기대와 압박, 핍박도 커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일을 이제 제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오병이어 앞에서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았고, 이제 풍랑 앞에서는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 같은 바람과 파도를 바라봅니다. 기적을 구경하며 따라다니는 것과, 그 기적의 능력을 믿고 자기 발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로 그 차이 속으로, 반드시 건너야 할 믿음의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오병이어를 보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고통과 시험의 바다를 건너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한탄하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바로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만들어 가셨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사명자가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주님은 때로 고난의 바다를 건너게 하시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다시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날의 풍랑도 제자들에게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그 바다를 건너면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깨닫고, 이전보다 더 넓고 깊은 주님의 바다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바다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3.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제자들이 풍랑과 씨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기서 ‘나다’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우리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옮기면 “나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을 조금 다르게 들어보았습니다. “나는 나다.” 물론 이것을 ‘에고 에이미’의 문자적인 번역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외딴 곳을 찾으셨고, 다시 밀려온 사람들을 하루 종일 돌보셨으며, 마침내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서셨던 예수님의 시간을 함께 바라보니, 이 말씀이 제자들을 향한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다시 붙드시는 선언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산 위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셨던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지나 다시 제자들에게 걸어오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을 먹여야 할 사람도, 그들의 고난을 짊어져야 할 사람도,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끝까지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도 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말씀에는 구약의 오래된 울림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답하셨습니다. 신학은 오랫동안 이를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문맥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곧 나다”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선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언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동시에 너와 함께 있는 자다.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복음서의 처음에서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풍랑 한가운데서 들려온 “에고 에이미”는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나다. 내가 여기, 너희와 함께 있다.

    제자들이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풍랑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그분이 그들의 풍랑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풍랑이 없는 삶을 믿는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의 풍랑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홀로 있음은 그렇게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기적을 구경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로 머물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결론

    우리 교회는 매년 여름 함께 퇴수회를 떠납니다. 저는 퇴수회를 준비할 때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떠나 따로 외딴 곳을 찾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잠시 일상에서 물러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곳을 보고 함께 웃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을 위해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온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묻기 위해 떠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앞으로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예수님의 외딴 곳도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곳이 아니라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자리였고, 사명을 내려놓는 곳이 아니라 다시 붙드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국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가족에게로, 일터로, 교회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에게로. 어쩌면 진짜 퇴수회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오디세우스가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귀향에는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가운데 참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혔을 때입니다. 폴리페모스가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대답합니다. “우티스.” 영어로 하면 ‘Nobody’. “나는 아무도 아니다.” 그 지혜 덕분에 그는 동굴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안전하게 빠져나온 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폴리페모스에게 외칩니다. “내가 바로 오디세우스다.” 그제야 폴리페모스는 자신을 눈멀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구합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에는 더 긴 고난과 풍랑이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며 말씀하십니다. “에고 에이미.” “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태는 아주 짧게 기록합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다.”

    참 묘한 대조입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하며 자신의 이름을 숨겼던 오디세우스는 결국 자기 이름을 과시한 뒤 더 긴 풍랑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에고 에이미. 나다.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바람이 그칩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남아 고향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지혜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하나님께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풍랑 한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홀로 이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에고 에이미. 나다.”

    우리가 삶의 풍랑을 만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그 풍랑을 통해 우리 믿음의 진면목을 보게 하시려는 것은 아닐까요. 평온할 때는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것이 흔들리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서게 될 때 비로소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특별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밤새 노를 저었지만 바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고, 해결책을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음이란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누구와 함께 이 바다를 건너고 있는지를 아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이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 길에 풍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 바다에서도 우리에게 걸어오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말씀 하나를 붙들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바다를 건너갑시다. 우리에게 모든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이 #우티스 #에고에이미 #백석동 #참포도나무교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하느냐?  (0) 2026.08.23
    마침내 믿음을 만나다!  (0) 2026.08.15
    그냥 내버려 두어라  (1) 2026.07.19
    함께 멍에를 메는 공동체  (0) 2026.07.06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  (0) 2026.06.1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