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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버려 두어라설교 2026. 7. 19. 10:37
그냥 내버려 두어라
마태복음 13장 24–30절, 36–43절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일이 있으신가요?
참아 보기도 하고 설득해 보기도 하며 기도까지 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려고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수록 일이 더 복잡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금 더 힘을 주어 붙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 포기해야 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과 밤새 씨름했던 야곱처럼, 내가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아서 사람과 상황을 붙든 채 밤이 새도록 버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끝까지 붙들어야 할 일과 외면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지만, 살아보니 인생에는 내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 있고, 계속 손을 댈수록 오히려 소중한 것까지 함께 다칠 수 있는 순간도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는 자신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린 한 농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렸고, 싹이 나고 이삭이 팰 무렵이 되자 종들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종들은 좋은 씨를 지키고 주인의 밭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라지를 서둘러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함께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장 속상해야 할 사람은 종들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좋은 씨를 뿌린 사람도 주인이고, 정성껏 가꾼 밭을 원수에게 훼손당한 사람도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들은 당장 가라지를 뽑겠다고 나서고, 정작 가장 속상할 주인은 침착하게 말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주인이 가라지에 무관심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종들의 눈에는 당장 없애야 할 가라지만 보였지만, 주인의 눈에는 가라지를 뽑다가 함께 다칠 밀의 뿌리까지 보였습니다. 종들은 문제를 없애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인은 그 과정에서 생명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내버려 두어라”는 말은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밀을 향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이어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좋은 씨를 뿌린 이는 인자이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라는 밭이 악으로 훼손되는 것을 누구보다 아파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악을 당장 모두 뽑아 버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용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악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무너질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은 악을 방치하거나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포기하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유로 사람까지 해치지 말고, 악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을 따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사람을 해치는 폭력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발견하자 곧바로 뽑아 버리겠다고 나섰는데,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씨를 지키고 싶었고, 주인이 정성껏 가꾼 밭이 망가지는 것을 막고 싶었으며, 원수가 저지른 일을 자신들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겠다는 열심이 밀까지 뽑을 수 있고, 정의를 지키겠다는 확신이 사람을 해칠 수 있으며, 진리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어느 순간 누군가를 제거하는 폭력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사람을 해치는 폭력을 멈추라는 가르침으로 읽었습니다. 가라지를 없애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해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했더라도 어느 순간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사람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때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밀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대화하고 이해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뽑아 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손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뽑습니다. 한 번의 잘못으로 그의 모든 삶을 판단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며,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그의 이름과 존재를 짓밟기도 합니다. 직접 때리지 않았다 해도 말로 고립시키고, 관계에서 밀어내며, 공동체 안에서 설 자리를 빼앗는다면 그것 역시 사람을 뽑아 버리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누군가를 몰아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폭력을 행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을 없애겠다는 이유로 사람까지 없애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지 말라는 뜻도 아니며, 피해를 입은 사람을 보호하지 말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존재까지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정말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동안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의를 말하면서 한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공동체를 지킨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없애는 것이 밭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인은 밀을 살리는 것이 밭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옳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과정에서 사람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냥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성급한 판단과 지나친 개입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 비유를 사람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라는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처음 자랄 때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드러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뽑으려 하면 가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밀일 수도 있고, 밀이라고 여겼던 것이 가라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한 장면을 보고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한 번의 실수나 실패를 그 사람의 본질처럼 여기고, 지금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오늘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이 내일도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리라고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이 내일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고, 오늘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으며, 우리를 실망하게 했던 사람이 긴 시간을 지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한 장면만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말과 행동 가운데 일부만 볼 뿐, 그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마음속에 어떤 상처와 두려움을 품고 있는지, 지금 어떤 싸움을 견디고 있는지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본 한 장면을 그 사람의 전부로 여기고, 지금의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 안에 남아 있을 수 있고, 내가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고 빚어 가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행동은 분별해야 하고 잘못된 행동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한 사람의 존재 전체와 그의 마지막을 우리가 판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판단은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곧바로 개입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잘못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내가 결정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며 끊임없이 말하고 설득하고 밀어붙이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삶에 깊이 개입하고, 배우자는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꾸어 보려고 하며, 교회는 공동체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계속 상대를 바꾸려는 것이 언제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내 뜻대로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지를 그대로 바라보고,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의 삶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헨리 나우웬과 그의 아버지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만 오랫동안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달라지기를 바랐고, 그 마음 때문에 관계에는 묘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우웬이 나이가 든 뒤 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고 서로가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자신이 원하는 아버지로 만들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자신의 기대에 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서로를 바꾸려는 마음을 내려놓자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는 전보다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어쩌면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상대의 모습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우리의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며,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필요한 거리를 두거나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행동을 분별하는 것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사랑은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가 상대를 밀어붙여 바꾸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실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는 멈추어야 합니다.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수 있고, 계속 개입하는 것이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이 말씀은 그 사람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서 네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급한 판단과 지나친 개입을 멈추십시오.
하나님께서 아직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해치는 폭력을 멈추고 성급한 판단과 지나친 개입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내려놓은 자리에 체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건과 역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붙들고 있어야만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갈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손을 놓으면 관계가 무너지고, 내가 계속 개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며,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놓았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손을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8장에는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집을 떠나는 야곱의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도망자가 되어 낯선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날이 저물자 야곱은 들판에서 돌 하나를 베개 삼아 잠들었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뜻대로 바꾸려고 애썼던 야곱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길 위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를 보여 주시고,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이 자신의 미래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미래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모든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길 위에 계셨고, 야곱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제야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우리의 삶에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며, 내 눈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새번역은 ‘마감’이라고 옮겼지만, 그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만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떨지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고통과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우리 역시 피조물과 함께 신음하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감당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까지 움켜쥔 채 모든 결과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면서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그냥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은 삶을 운명에 맡기거나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이끌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며, 내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든 것의 시작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인가를 더욱 강하게 붙드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붙들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네가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모든 것을 이끌고 바꾸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께서는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내버려 두되, 좋은 씨로 살아가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지막 때만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했지만, 밀에게 자라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서 밀의 성장이 멈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밭의 형편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밀은 가라지와 함께 있는 밭에서도 밀로 자라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좋은 씨로 자라는 일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뽑아내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았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하고,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며,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분노하는 동안 정작 내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세상의 모든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어진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미워하다가 나까지 가라지를 닮지 않고, 악과 싸우다가 내 마음까지 악해지지 않으며, 거짓을 바로잡겠다는 이유로 나도 거짓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씨를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창한 일을 이루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쉽게 판단하기보다 오래 기다리며, 상처를 되갚기보다 사랑과 진실의 열매를 맺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뽑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선하게 살아도 인정받지 못하고, 진실하게 살아도 손해를 보며, 사랑을 베풀고도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라지가 밀보다 더 잘 자라는 것처럼 보이고, 악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무엇이 옳은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가라지가 마지막이 아니고 악이 마지막이 아니며, 우리가 흘린 눈물과 신음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마지막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해치는 폭력을 멈추고, 한 장면만으로 한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거나 그의 삶을 내 뜻대로 바꾸려는 일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붙들 수 없는 사람과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여러분이 심어진 자리에서 좋은 씨로 살아가십시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되, 내가 해야 할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맺어야 할 선한 열매는 끝까지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사람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네 손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판단과 마지막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네가 심어진 자리에서 좋은 씨로 자라라.
사람을 뽑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진실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라.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께서는 손을 놓지 않으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밭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좋은 씨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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