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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멍에를 메는 공동체
    설교 2026. 7. 6. 13:47

    함께 멍에를 메는 공동체

    마태복음 11:16-20, 25-29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아내가 저에게 한 영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홀로 키우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홀로 남게 될 아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살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때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도 아버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에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두려운 현실은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겨질 아들의 미래였습니다.

     

    저는 그 영상을 끝내 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영상을 보는 소리만 곁에서 들었을 뿐입니다. 그 소리만으로도 어떤 이야기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 영상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제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교회를 섬겨야 했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으며, 회사의 대표로서 직원들과 회사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법인 회사를 시작한 뒤에는 그 무게가 몇 배는 더 커졌습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때에는 행사 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객의 행사 기획부터 공원 사용 신청서까지 함께 도와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미 제 앞에 놓인 일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의 삶의 무게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다른 사람보다 먼저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함께 울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사람은 악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서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반응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을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놀았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할 때는 피리를 불며 함께 춤을 추었고, 장례식 놀이를 할 때는 곡을 하며 함께 울었습니다. 놀이는 서로 반응해야 비로소 놀이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함께 울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어서 설명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한 사람은 광야에서 금욕의 삶을 살았고, 다른 한 분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두 분을 단순히 거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 분을 폄하했고, 혐오의 언어로 공격했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메신저 공격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지를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메신저를 공격했습니다. 요한의 말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들렸다.”고 낙인찍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먹기를 탐하는 사람”, “술꾼”, “죄인의 친구”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확인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을 닫아 버린 사람은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결국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러시아 제정 말기의 라스푸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라스푸틴에게 속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을 찾았다기보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사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불안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진실보다 확신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해 줄 말을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해 줄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옳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 요한을 공격하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닫힌 사람은 피리 소리에도 춤추지 못하고, 곡소리에도 함께 울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을 꾸짖으신 뒤에 갑자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신약학자 울리히 루츠는 이 전환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예수님은 거절을 경험하셨습니다. 요한도 거절당했고, 예수님도 거절당했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감사하십니다. 모두가 거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됩니다. 크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뒤 곧바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쉼을 주신다면서 왜 다시 멍에를 메라고 하실까요?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삶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책임져야 하고, 섬기기 때문에 더 희생해야 하고, 믿기 때문에 더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로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가장으로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대표로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쉼은 아무 짐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짐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짐을 지고도 무너지지 않는 길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신약학자 워런 카터는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단순히 개인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로만 읽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와 세금, 종교적 부담과 가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삶 자체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초청입니다. 세상이 지운 짐을 혼자 견디지 않도록,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배우고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정직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함께 멍에를 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함께하자고 말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그 짐을 져야 하느냐”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다시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 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맡기신 길이라면 걸어가야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십자가라면 그 길이 아무리 고단해도 걸어가려고 합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그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소망은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길의 동행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십자가를 대신 져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 짐을 대신 감당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작은 손 하나를 얹어 함께 걸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끝내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홀로 걷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가 그런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홀로 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홀로 무너지도록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누군가를 혼자 짐 지게 내버려 두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작은 손 하나를 얹어 주는 공동체.

     

    울어야 할 때 함께 울고, 기뻐해야 할 때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

     

    그것이 함께 멍에를 메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주님은 우리가 짐이 없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나 혼자만 쉬는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혼자 무너지지 않게 하는 길을 배웁니다. 내 짐만 내려놓는 길이 아니라, 누군가의 짐 위에 작은 손 하나를 얹는 길을 배웁니다.

     

    우리 참포도나무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각을 확인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공동체.

     

    메시지가 불편하다고 메신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공동체.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질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혼자 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공동체.

     

    함께 멍에를 메는 공동체.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며,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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