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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설교 2026. 6. 14. 10:43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
마태복음 9:35-10:4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참교육」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입니다. 저도 아내가 열심히 보길래 옆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드라마 속에는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등장합니다. 그 기관의 이름은 ‘교권국’입니다. 아마도 교육 현장 속에서 무너진 ‘교권’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응하는 이유가 단지 누군가 혼나는 장면이 통쾌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밑에는 무너진 교육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누군가 이 무너진 자리를 다시 바로 세워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드라마 전체에 흐르는 정서가 결국 동해보복법, 곧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그만큼의 고통을 되돌려 주어야 정의가 세워진다는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이 가능하려면, 교육을 바로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더 강한 힘과 권력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보다 더 큰 힘으로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도 평화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힘으로 눌러 만든 평화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라고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질서가 세워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이 남습니다. 사람은 잠시 조용해질 수는 있어도, 참으로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실이 답답할수록 사람들은 그런 장면에서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드라마 속 판타지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세우는 일은 응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육이 무너졌다고 느낄수록, 우리는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가?
무너진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너진 현실 앞에 서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더 강한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응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무너진 현실을 모른 척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라봄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겉모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고단함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지친 삶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방향 잃은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습니다. 종교는 있었지만 위로가 없었고, 율법은 있었지만 생명이 없었고, 공동체는 있었지만 품어주는 목자의 마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고단함을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이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먼저 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먼저 성과로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먼저 죄와 실패로 단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지친 사람을 지친 사람으로 보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문제로 보기 전에 먼저 지친 사람으로 보는 것. 사람을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전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로 보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력 부족의 호소가 아닙니다. 교회에 봉사자가 부족하니 더 열심히 일하자는 말로만 읽으면 본문이 좁아집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이 본문이 말하려는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지친 사람들이 많은데, 그 곁에 서 줄 사람이 적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은 많은데,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적다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일을 묻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묻습니다.
“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마태복음을 깊이 연구한 울리히 루츠라는 학자는 마태복음을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복음서로 읽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유대 신앙 전통 밖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 종교의 창시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 안에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단순히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무너진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고생에 지쳐 기운이 빠진 이들을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단체의 회원을 모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세우시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열두 제자의 이름을 하나씩 기록합니다. 베드로라고 부르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사람 유다입니다.
이 명단을 가만히 보면 참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열정적이고 앞장서서 일했지만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세리는 로마의 세금 체계와 연결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대로 열혈당원 시몬은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흐름과 연결된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있기 어려운 사람들이 한 명단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어느 누구도 쉽게 선발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명단은 완벽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고, 부족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서로 부딪힐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영웅을 기다립니다. 무너진 현실을 보면서 누군가 강한 사람이 나타나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돌볼 참된 목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올 특별한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서로 다르고, 때로는 흔들리는 바로 그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을 주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들이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준비가 완벽해서도 아닙니다.
실패하지 않을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 붙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여기서 나옵니다.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
제자는 먼저 일꾼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먼저 주님의 긍휼 안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일꾼으로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사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버텨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공동체 안에는 책임이 필요합니다. 섬김도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수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기 전에 먼저 보십니다. 우리의 능력을 묻기 전에 우리의 지침을 아십니다. 우리의 성과를 요구하기 전에 우리의 아픔을 보십니다.
그런데 사랑받은 사람은 사람을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보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쉽게 단정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 세워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친 사람 곁에 서는 일이 자기 증명이 아니라 응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견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그 권능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사람을 누르는 힘이 아니라 일으키는 힘입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힘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진 힘도 그래야 합니다. 신앙의 언어도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더 지치게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더 무겁게 한다면 우리는 참 목자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내 곁에 있는 가족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교회 안의 성도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실패한 사람, 지친 사람, 느린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문제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짐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평가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헨리 나우엔은 라르쉬 공동체에서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담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우엔은 아담을 돌보면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쓸모가 있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복음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기 전에 먼저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쓸모로 보기 전에 사랑받는 사람으로, 문제로 보기 전에 지친 사람으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기 전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참교육」 이야기를 했습니다. 드라마 속 교권국은 잘못된 아이들을 응징하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시원함을 느끼지만, 우리는 그것이 판타지라는 것도 압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더딥니다. 때로는 일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기다려야 하고, 서로를 신뢰해야 하고, 쉽게 단정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느린 길이야말로 참된 교육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참된 변화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아주 작은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문제로 보기 전에 지친 사람으로 보고, 사람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기 전에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시작의 결말은 우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추수밭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먼저 사랑받은 사람으로, 주님의 눈을 배워 가며,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 곁에 서면 됩니다.
우리는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받은 사람만이 지친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공동체에 그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문제로 보기 전에 지친 영혼으로 보게 하시고, 사람을 일거리로 보기 전에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보게 하시고, 우리 자신도 먼저 주님의 긍휼 안에 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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