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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높이는 신앙 공동체설교 2026. 5. 17. 10:39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앙 공동체
에베소서 1:15–23 / 누가복음 24:44–53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의 승천일입니다. 그리고 지난 15일은 스승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주의 승천일과 스승의 날을 함께 기념하며 예배하게 되어 더 뜻깊은 주일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선생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앙 공동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말 많은 정보를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휴대전화만 열어도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쏟아집니다.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쉽게 알게 되었고, 또한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지만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더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삶의 방향을 묻는 진지한 질문들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시대가 되었고, 연결은 넘쳐 나지만 관계는 점점 사라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이런 시대일수록 대학의 기능이 축소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인공지능이 모두 가르쳐 주는데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꼭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대학이 원래 기능했던 지식 추구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시대에는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주고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공지능은 그럴듯한 답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은 문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 곁에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인공지능은 그럴듯한 설교문을 만들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살아내는 삶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의 시대일수록 ‘어떤 사람 곁에 있었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는 그 사람이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떤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어떤 기업에서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삶을 배웠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누구와 함께 살아왔는가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시는 선생님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올바른 삶의 방향을 보여주신 스승이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마음이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됨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지고, 자신이 목도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 바라봄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성서 전체가 이미 그 이야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들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승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이루어 오신 구원의 역사였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자신의 삶으로 그 말씀을 살아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진정한 스승이란, 자신이 말한 삶을 미리 살아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선생님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 무엇이 아름다운 삶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바로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식만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권위를 느꼈습니다. 왜 권위가 있었을까요? 삶과 말이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말씀하시고 실제로 그 사랑을 몸소행하셨습니다. 말이 있고 행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모두 한 원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용서를 말씀하셨을 때 실제로 용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낮아짐을 말씀하시고 실제로 가장 낮은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멋진 말을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아름다운 삶을 바라보고 말씀하시고 살아내신 분이란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베소서에서 바울 또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여러분 우리는 바울의 기도에서도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자기 욕망만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으려는 욕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품게 하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오르는 것도 더 많은 지식을 깨닫는 것도 아닌 다만 기도의 방향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바라는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단지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방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게 하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이 말씀은 단순한 꾸중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늘만 바라보며 멈춰 서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승천은 예수님의 사라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 되심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몸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고,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자기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나오면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습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 교회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면서 실현하기 위한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표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자기 안에 갇힌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단순히 정보를 많이 가진 공동체보다 어떤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인가가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화려한 말만 듣고 감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한 삶을 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현실로 드러나는 공동체를 기대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의 표어는 “일상속의 예수살기”로 잡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자꾸 자기 자신을 목적처럼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할 공동체가 어느 순간 자기 만족과 자기 보존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교회를 소비의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가?”
“내 취향에 맞는가?”
“내가 만족하는가?”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그렇습니다. 물론 교회는 교인들을 위한 위로와 돌봄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서비스 공간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 성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 권력을 가졌을 때 더 낮아질 줄 아는 사람. 그런 아름다운 삶이 교회 안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사람들은 화려한 말보다 진실한 삶을 더 신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 날 우리의 교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님을 머리로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의 모습은 간데없고 사람냄새만 풀풀 나는 곳으로 바뀐 것은 아닌지? 우리는 다시금 고민하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교인들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보다 저희는 풍성한 애찬을 나누고 다른 곳에서는 꿈도 못꿀 맛있는 커피를 함께 나누고, 캠핑장과 같은 분위기에서 코이노니아를 나눕니다. 이런 모습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저는 때론 이런 편안함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어야 하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소홀하게 할까봐 마음이 졸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저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고민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올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의 목적은 결국 사람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를 높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참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붙잡아 두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셨는데도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 다스리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승천 이후 교회는 세상을 등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다시 삶으로 돌아갑니다.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일터로 돌아갑니다. 눈물 있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며 살아갑니다.
말로만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을 품는 것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로 가는 것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의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사람. 정답을 말하는 사람보다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보다 삶을 살아내는 사람. 그리고 교회 역시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럴듯한 정보를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곳.
예수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살아내는 곳.
예수를 말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닮아가는 곳.
부디 우리 참포도나무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세상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삶의 눈을 열어주는 참된 스승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가 우리 모두 가운데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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