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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설교 2026. 1. 25. 10:20
성서본문 : 마태복음 4장 12-17절
지도를 쥐고만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행을 좋아하십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여행을 참 좋아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때로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일에 몰두할 때는 좀처럼 얻지 못하는 통찰이 길 위에 있을 때는 불쑥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로드무비를 좋아합니다. 어디에 도착하느냐보다, 그 길 위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교우들과 함께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스탠바이미(Stand by Me)」 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네 명의 사내아이들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핵심은 ‘어디까지 갔느냐’가 아니라, ‘그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는가’에 있습니다. 길을 떠나기 전의 아이들과 길을 다녀온 후의 아이들은 같은 얼굴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던 중 저는 문득 이런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 그리고 이 말 한마디를 마음에 품고 본문을 다시 읽어 내려가니, 그동안에는 보지 못하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주님의 사역이 ‘머무름’이 아니라 ‘떠남’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떠남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 역시 익숙한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왜 삶의 변화가 없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 입구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습니다. 또 커피마을의 가장 중앙에도 샹들리에가 하나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샹들리에라니, 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샹들리에야말로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교회 현관과 카페 현관에 굳이 샹들리에를 달아 놓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참아내기만 해야 하는 고행이 아니라,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기쁘고 신나는 축제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신앙을 너무 오래 무거운 의무와 부담의 언어로만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견뎌야 하는 짐이고, 신앙은 포기와 인내의 목록이 되었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삶의 기쁨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처럼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은 있지만 설렘은 없고, 말씀은 있지만 기쁨은 사라지고, 믿음은 고백하지만 삶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둡고 무거운 종교의 방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빛이 있고, 잔치가 있고, 삶이 다시 살아나는 여행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현관과 카페의 현관에 샹들리에를 달아 두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아, 여기는 참아내는 곳이 아니라 기쁜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구나” 그렇게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여행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어떤 여행을 떠나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보십시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때를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이 모든 것이 잘 풀리던 평안한 시절에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외치던 선지자, 세례요한이 권력에 의해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떠나신 여행은 상황이 좋아진 뒤에 떠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의 길에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 상태에서 시작된 여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향하신 곳은 더 안전한 자리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중심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곧 성경이 “어둠에 앉아 있는 땅”, “사망의 그늘진 곳”이라 부르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하자면 예수님이 떠나신 여행은 현실을 피하는 여행이 아니라, 현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여행이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빛이 가득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빛이 가장 필요한 자리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떠나야 할 여행도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익숙해서 변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불편하지만 생명이 움트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 나만 안전한 신앙의 공간에서 나와 이웃의 고통과 마주하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여행이라고 믿습니다.
메타노이아의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성서 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타노이아’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분명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신앙은 생각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을 동반하지만, 그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깨달음을 일으킨 뒤에, 마침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버리고야 마는 힘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서는 것, 곧 떠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회개, 메타노이아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란 후회에 머무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책하며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어 실제로 걸어 나서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떠나야 할 여행은 멀리 떠나는 여행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옮겨 서는 여행입니다. 그 한 걸음이 삶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성취와 그렇지 않은 현실 사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셨고, 성경은 분명히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전쟁은 멈추지 않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정글과 같은 험악한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최근 뉴스를 보십시오. 강대국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압박하는 일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일들을 주도하는 이른바 ‘마가(MAGA) 세력’이 스스로를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약소국을 짓밟는 칼을 휘두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도 그들은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탐욕을 종교의 언어로 포장한 ‘제국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때로는 지적인 유희로까지 즐기지만, 정작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티켓을 손에 쥐고 감탄만 할 뿐, 예수님의 방식대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젯밤 저는 청년들과 함께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신년 초에 읽기에 참 잘 어울리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이 딜레마를 정확히 꿰뚫는 통찰을 담고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성취되었다’는 말은 약속이 끝났으니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흩어져 있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였고, 그래서 우리가 그 약속을 더 분명하게 함께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문장은 ‘성취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성취되었다는 말은 여행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떠나야 할 여행의 모든 계획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지 교리적인 동의나 신학적인 이해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를 모두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는 바로 이 말에 착안하여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을 신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는 길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을 따라 실제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메타노이아 1 / 슈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
그렇다면 이 확실한 약속을 붙잡고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회개하라.” 그 어떤 예화도 교리도 거창한 신학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회개를 거창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제 몸으로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매주 치과에 갑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누워 입을 벌리고 기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뼛속 깊은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 다시는 내 치아를 이렇게 방치하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회개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후회일 뿐입니다. 후회하는 마음은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회개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회개의 완성은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진짜 회개는 치과 진료실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칫솔을 들고, 귀찮아도 하루를 정리하고, 삶을 관리하고 절제하는 방향으로 습관을 바꾸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실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바로 이런 회개입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뜻하는 말은 ‘슈브(Shuv)’인데, 이 말의 뜻은 삶의 방향을 실제로 틀어버리는 것입니다. 썩은 습관을 도려내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서를 통해서, 그리고 부족한 설교자를 통해서 한결같이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은 정죄의 말씀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면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메타노이아 2 / 시선이 바뀌는 신앙
그러나 회개는 내 습관만 고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나의 태도까지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저신용자들에게 담보 없이 대출해 주는 마이크로뱅크 운동을 하는 분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부실채권율이 20%가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도덕적 해이다.” “갚을 능력도 없는데 왜 도와주냐.” “빚진 건 개인 책임 아니냐.”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가운데 ‘누칼협’이란 말이 있습니다. 너무 무섭고 잔인한 말인데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흔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이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칼들고 협박을 했어?”라는 뜻이라지요. 이런 표현을 설교 시간에 올려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야 말로 이 시대의 어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마이크로뱅크의 대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분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20%의 실패가 아니라 80%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신약이 말하는 회개, 메타노이아구나. 빛을 본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 발 물러서 공감과 너그러움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저는 예수님을 만난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권을 연장하라!
여러분 신앙을 갖게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시민권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쾌적이 적혀 있는 여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권이 있다고 모두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듯이 어떤 이들의 여권은 십년전에 멈춰져 있고 또 어떤 이들은 3,4년전이 마지막 여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여권에도 만료 기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권이 만료가 되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행을 떠나려면 다리가 떨리기 전에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다리가 떨리다 보니, 지금이라도 더 자주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삶의 습관을 바꾸고, 시선을 바꾸고, 한 걸음을 옮길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2026년 새해, 더 이상 티켓만 만지작거리는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에 머물지 마십시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 여행을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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