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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묵상하지 말고, 은총을 구독하라설교 2026. 1. 18. 09:09
본문: 잠언 3장 5-6절
일본어 구독과 '나를 믿지 않는 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새해를 맞이하고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새해가 되면 누구나 이런저런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저 역시 이번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공부를 하나 시작했습니다. 바로 일본어 회화 공부입니다.
그런데 저는 서점에 가서 일본어 책을 사서 독학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일 정해진 시간에 회화 내용이 배달되는 '구독 서비스'를 신청했습니다. 하루에 딱 정해진 시간만큼은 공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연약한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 의지로 시작하면 작심삼일로 끝날 게 뻔합니다. 그래서 제 연약한 의지를 믿는 대신, 저를 공부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저를 맡겨버린 것입니다. 제가 공부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공부가 저를 찾아오게 만든 것이죠.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의 원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왜 매년 계획을 세우면서도 실패하고 걱정만 늘어놓습니까? 내 연약한 '의지'를 믿고, 내 부족한 '명철'을 의지해서 혼자 아등바등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의지로 하는 '독학'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매일매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의 시스템에 내 인생을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오늘 잠언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아멘'으로 화답할 물리적인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습관적으로, 반사적으로 나오는 입술의 아멘은 오늘은 잠시 멈춰주십시오. 오늘만큼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멘'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정말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진짜 아멘'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왜,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내면을 아주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첫째,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저주받을 교만'이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예레미야 17:5)
성경은 우리가 내 경험과 '육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단순히 '실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상태'라고 규정하며, 더 나아가 '저주'라고까지 경고합니다. 우리가 기도보다 내 판단을 앞세울 때, 그것은 내 팔의 힘이 하나님의 팔보다 강하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적 무능력'을 지적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예수님의 말씀은 준엄합니다. "너희가 밤새 머리를 싸매고 걱정한다고 해서, 네 생명을 단 1초라도 늘릴 수 있느냐?" 만일 우리가 염려와 걱정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걱정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는 문제 해결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증거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셋째,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악한 허탄함'이라고 꾸짖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4-16)
교회 안에서는 "주여"를 외치면서도, 정작 비즈니스 현장이나 자녀의 진로 앞에서는 "주의 뜻이면"이라는 단서를 빼버리고 내 계획대로 밀어붙이는 태도. 성경은 이것을 지혜라고 하지 않고 '악한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말씀의 해법: 잠언이 제시하는 믿음의 3단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3장 5절과 6절은 우리에게 분명한 세 가지 해법을 제시합니다. 이 말씀을 기둥 삼아, 성경 전체가 말하는 믿음의 길을 걷길 원합니다.
첫째,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큰 생각'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왜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잠언의 말씀을 이렇게 뒷받침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신앙은 내 좁은 식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높고 크신 계획(Big Picture)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높은 수'가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명철을 버리고 주님을 의뢰하는 태도입니다.
둘째, '범사에 인정'한다는 것은, 염려의 돌을 주님께 '굴려 보내는' 것입니다.
본문 6절 상반절은 명령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과 짝을 이루는 시편 37편 5절을 보십시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편 37:5)
여기서 '맡기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갈랄(Galal)'의 무게감을 느껴보십시오. 이 단어의 뜻은 '굴려 버리다(To roll away)'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우물 아귀를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굴려낼 때 쓰던 단어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염려의 바위를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굴려버리는(Roll)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는 "주님 맡깁니다"라고 해놓고, 나갈 때는 다시 그 짐을 챙겨 나갑니다. 이것은 '갈랄'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문제는 이제 제 손을 떠났습니다."라고 완전히 이양하는 것. 그래야 주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셋째, 주님을 앙망할 때, 주께서 친히 길을 만드십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6절 하반절은 약속합니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주님이 지도를 그려주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 골몰하는 시선을 거두어, 지도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문제보다 크신 예수를 앙망(仰望)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잠언의 약속대로 막힌 길을 뚫으시고 굽은 길을 펴사,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의 증인들: 지도가 없어도, 창고가 비어도
이러한 말씀의 원리를 삶으로 살아낸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너희도 이렇게 살라'고 도전합니다.
첫 번째 증인은 '말씀을 따라간'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이 짧은 구절 속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적인 명철로 보면 이것만큼 대책 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지도가 없는 여행이라니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갈 바(목적지)'를 알지 못했지만, '부르심(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지도가 아니라,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침반 삼아 발을 떼었습니다.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운명을 걸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길을 친히 지도하셨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두 번째 증인은 '일용할 양식을 구한' 조지 뮬러입니다.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 양식이 다 떨어져 300명의 아이들이 굶게 생겼을 때, 뮬러는 당황하지 않고 빈 접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이 기도는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의 약속'을 철저히 믿은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사람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출애굽기 16:4)
하나님은 뮬러에게 1년 치 식량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창고를 가득 채울 재물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광야의 만나처럼, 딱 그날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었습니다. 이걸 제대로 번역하면 ‘하루분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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