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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단한 삶의 자리로 내려오신 예수
    설교 2026. 1. 3. 23:16

    고단한 삶의 자리로 내려오신 예수

    본문: 요한복음 1:1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 첫 주일입니다. 달력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새 소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가 다시 마주할 현실은 그리 새롭지 않습니다. 어제와 같은 피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여전히 붓기가 빠지지 않은 다리로 내일의 출근길을 걱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새해라는 말은 우리 삶의 고단함을 잠시 가려주는 얇은 화장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그 화장이 지워지고 나면, 오히려 더 고단한 삶이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활기찬 일상을 살고 싶지만 눅눅하고 고단한 일상이 우리를 덮쳐옵니다. 새해를 힘차게 시작하기보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마음이 먼저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시간은 새해가 되었지만, 우리의 일상에는 아직 새해가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은 우리의 고단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고단한 현실 속으로 친히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인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육신의 복음을 붙들며, 고단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려 합니다.

     

    우리와 같은 이 되신 신비

     

    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피상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위로나 적당한 조언으로 이 문제를 덮어두지도 않습니다. 성공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삶의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고, 서둘러 위로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다소 파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한 문장을 던져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육신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고상한 본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사르크스(Sarx) 라 불리는 이 단어는 병에 걸릴 수 있고, 상처를 입으면 피가 흐르며, 세월 앞에 낡아가는 바로 그 연약한 살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고백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한계와 연약함을 지닌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도리어 세상은 지금도 인간이 신처럼 군림하려 하고, 마치 자신이 신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삶 속으로 하강하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의 삶을 관찰하는 차가운 분석자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와 똑같이 배고픔을 느끼고, 먼지 나는 길 위에서 발바닥이 부르트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눈물이 흐르는 그 자리까지 기꺼이 내려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정보로 아시는 분이 아니라, 몸으로, 신경으로, 기억으로 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내 곁에 나란히 쳐진 하나님의 천막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의 본래 뜻은 우리 곁에 천막을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천막은 견고한 성벽이 아닙니다. 비바람 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밤공기의 냉기가 스며드는 연약한 거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삶의 야영지, 그 거칠고 척박한 흙바닥 위에 당신의 천막을 나란히 치셨습니다. 우리들의 한숨 섞인 식탁 옆에, 야근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 책상 옆에, 병마와 싸우며 밤잠을 설치는 환부 곁에,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숨 쉬고 계십니다.

     

    그리고 천막이 의미하는 것은 한곳에 단단히 정착하지 못한 채 매일 다른 삶의 자리로 옮겨 다니는 우리의 고단한 삶 그 자체입니다. 겉으로는 정주한 것 같지만, 실상은 떠돌이와도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 있습니다. 그 떠도는 삶의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이미 당신의 천막을 치고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분명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곤비함을 아시는 창조주

     

    우리는 흔히 신앙이 깊어지면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 피곤하여 우물가에 주저앉으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겪으셔야 했던 거룩한 피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너무 고단합니다라고 호소할 때 주님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대신 지친 우리의 손을 붙드신 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안다. 나도 그 길 위에서 주저앉아 보았단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깊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주님도 우리처럼 곤비함을 느끼셨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힘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멀리서 이해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겪어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서 안에 담긴 이 인간적이고도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완벽을 요구하는 종교와, 내려오시는 하나님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완벽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완벽해지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종종 그렇게 오해됩니다. 조금 더 나아져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조금 덜 비루해져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완벽해진 우리를 기다리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완전함 속으로, 비루함과 고단함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오신 분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 케노시스의 신앙이 있습니다. 자기를 비워 낮아지셨다는 빌립보서 2장의 고백이 바로 이 성육신의 자리에서 다시 들려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루함과 고단함 가운데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희망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고단함을 영접하는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 그러나 여전히 고단한 일상.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단함을 벗어난 뒤에 비로소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단함 한가운데로 먼저 들어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2) 여기서 영접하다는 말은 단순히 환영하거나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손을 내밀어 받아 들이고, 자기 삶 안으로 끌어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자기 몫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영접은 완전해진 나를 내어놓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단한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분의 낮아지심과 연약함까지 함께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고단함을 부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고단함을 숨기거나, 빨리 극복해야 할 문제로만 여기는 신앙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단함을 영접하는 신앙입니다.

     

    그 고단함 속으로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영접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는 분이 아니라, 가장 낮은 우리의 피로 속으로 가장 먼저 강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단함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거룩한 만남의 자리, 은혜가 시작되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2026년 한 해, 삶이 여전히 고단할지라도 그 고단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 성육신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 그리고 매일의 고단한 걸음 위에 은혜 위에 은혜로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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