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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올라야 하는 변화산설교 2026. 2. 15. 10:52
오늘, 우리가 올라야 하는 변화산
본문: 마태복음 17:1–9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넘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그 은총은 매일의 삶 가운데서 누리며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와 함께, 산 위로 오르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 후 마지막 주일이며 또한 변화주일입니다. 이제 저희는 다음 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순절을 앞둔 시기에 교회는 전통적으로 변화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어둠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시기라고 한다면 변화주일은 빛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빛과 어둠 그리고 기쁨과 고통의 대비를 볼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세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좋았는지,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자신의 주도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베드로의 독단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느꼈던 놀라움을기록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스승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아와 한자리에서 빛을 발하면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결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변화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빛과 밝음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음성’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장면을 두고 신약학자 W. D. Davies는 이 사건을 시내산 사건의 재현이라고 설명합니다. 모세가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산 위에서 영광 가운데 드러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스스로 빛을 발할 것이 아니라 빛을 반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은 모세를 향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향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Davies는 이 장면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모세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리키던 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율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의기소침해진 공동체를 향한 소망의 메시지
그러나 또 다른 신약학자 울리히 루쯔(Ulrich Luz)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던집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보다, 왜 마태 공동체가 이 이야기를 붙들었는가에 집중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의 시대에 기록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포로시대에도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지하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율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울리히 루쯔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마태 공동체는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속에 있었고, 내적으로는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배제되기도 했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분의 음성을 들어라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을 더 엄격하게, 더 강하게, 더 철저하게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보다 정죄의 기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붙들면서도 사람들은 그 율법이 시작한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전반에 율법주의는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이들이 사회적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주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율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넘어 그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조문이 아니라 중심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규정이 아니라 관계를 들으라는 말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그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세례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는 그 정체성 위에 하나의 요청이 더해집니다. “들어라.” 정체성의 선언이 순종의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선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확장됩니다.
이것은 매우 지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더 잘 지켜라.” “더 철저히 행하라.” “더 엄격하게 기준을 맞추라.” 그러나 변화산의 음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들어라.”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야 변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행동 이전에 중요한 것은 바로 듣기입니다. 열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선행해야 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또한 율법의 조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게 되었고, 자신들의 눈에 옳지 않게 보이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을 통해서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주권을 로마에게 빼앗겼고 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예루살렘 성전도 홰파되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숨을 막히게 하였고 공의는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어디를 보더라고 그들에게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룩한 씨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변화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변해야 산다
저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제도가 아닙니다. 강한 압박도 아닙니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생각할 때 바둑을 떠올리곤 합니다. 바둑은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돌 하나를 놓고, 또 하나를 놓고, 그렇게 이어가야만 판이 살아납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습니다.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놓아야 할 돌이 있고, 내디뎌야 할 발걸음이 있습니다. 그 한 수, 그 한 걸음이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따라 한 수를 두는 삶이 우리를 변하게 할 것이라고. 그리고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변해야 삽니다. 말씀을 듣고 변해야 우리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들
저는 살면서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빛은 화려함의 빛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빛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필요를 살피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리 내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 하나님의 산을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말씀을 묵상하고, 엘리야의 일갈을 기억하며, 자신의 자리를 성실히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대화하며, 그 음성에 따라 한 걸음씩 내디뎠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에서 변화산의 빛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나날이 낡아갑니다. 몸은 쇠하고, 환경은 변하고, 세상은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여러분의 얼굴빛은 빛이 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입니다. 빛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음성을 듣고 다시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삶. 그 거룩한 변화산에서 환하게 빛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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