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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설교 2025. 9. 28. 10:49
제목: 환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본문: 누가복음 16:19–3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 앞에 서는 이유는 단순히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비추시고 새로운 길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에 세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는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의 특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한국 교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부터 각인된 구호가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를 믿으면 천당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 말이 교리적으로 볼 때는 그리 틀린 말은 아닐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 무리 없이 사람들에게 통용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대채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사실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문제는 죽은 이후의 삶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오히려 오늘의 구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래서 오늘 우리가 느끼고 고백하는 감사와 기쁨에 숨겨져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근원이 바로 믿음이고 그것이 우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구호는 구원을 죽은 뒤로만 미루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더 큰 문제는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언제나 관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문제를 성서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편안한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따뜻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항상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장소가 아닌 관계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부자지옥, 거지천국?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에는 죽은 뒤에 지옥으로 떨어져서 고통을 받는 어떤 부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죽은 뒤에 지옥으로 떨어져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고 오히려 그의 집 앞에서 불쌍하게 구걸을 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본문으로만 보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니라 “부자지옥 거지천국”이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구절만을 놓고 그것을 교리로 구성을 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은 단순히 ‘부자냐 거지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거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면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그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완벽해보였던 어떤 부자의 한 가지 문제
오늘 성서는 부자의 화려한 삶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나 제사장, 권세자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수입해온 최고급 아마포로, 당시 상류층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잔치와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벽한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한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몸은 헌데투성이였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성서를 읽으면서 보았던 가장 영화적인 순간입니다. 마치 봉준호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 앞의 나사로’를 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마도 나사로가 그 집앞에 있었던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라도 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문 앞의 나사로’를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문을 열어서 나사로를 환대를 했다면 그 부자는 죽은 뒤에 낭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평한 죽음
그런데 어느 날 동시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게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부자도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호화롭게 즐기면서 잔치하던 삶이 끝이나고 그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고 그는 지옥으로 옮겨져서 그곳에서 고통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눈을 들어서 보니 그곳에 아브라함이 있었고, 그 품에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꼰대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애야, 되돌아보아라. 살아있을 때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 고통을 받았으니, 이렇게 죽은 뒤에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편하게 쉬지만, 부자는 살아 생전에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도리어 죽어서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래된 심판에 대한 계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의한 부자가 죽은 뒤에 심판을 받고 지옥을 가고,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에 간다는 관념말입니다. 이 관념은 고대 근동에는 흔했던 생각들입니다.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만의 새로운 관점을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십니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것도 그가 거지였기 때문이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을 우리는 여기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불구덩이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제발 나사로가 넘어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가 있는 지옥과 그들이 있는 곳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어서 이곳에서 저곳을 갈 수도 없고, 저곳에서 이곳으로 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는 서로 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극은 끝나지 않고 고통은 줄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렁텅이에 익숙한 것은 바로 부자였습니다. 그의 집과 나사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렁텅이 밖은 자신이 상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그 구렁텅이를 허물고 메꿔서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면 그는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
반면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살아생전에 너무도 고통스럽고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보다는 오히려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으면서 살고자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서는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성서는 그것을 ‘연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너무도 불쌍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를 긍휼하게 여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도 명확해 보입니다. 그것은 ‘어떤 부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고 기뻐할 일이지만 누군가 자신의 집 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면 그를 외면하지 않고 문을 열어서 그를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통을 그 지역 사람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집트에서는 아침식사가 10시에서 11시인데, 이 시간에 공무를 보러온 민원인들에게도 밥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환대’의 문화인 것입니다.
어떤 부자의 어리석은 행보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성서에서 말한 ‘어떤 부자’의 모습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부자가 누구인지는 이름을 지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그래도 여러분은 누구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월드를 세계 곳곳에 세운 부자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지지자들의 열정이 만든 것입니다.
그는 취임을 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국경지대에 건널 수 없는 높은 철책을 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게도 관세폭탄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의약품회사들은 그 나라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100%의 관세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은 MAGA세력이라고 합니다.
마가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이니까, 관세폭탄도 받아들여야 하고, 전문가로 일하려면 1억 이상의 수수료로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대함, 환대
미국이 정말 위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입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관세를 철폐하고 다른 나라들과 거래를 했고, 그 일로 인해서 한국과 같은 나라들은 더욱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난민을 받아들였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높였을 적이 있습니다. 이 때가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이라고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서는 우리에게 ‘환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도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자신처럼 살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부자도 자신의 가족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것은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 저 건너편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문을 열고 ‘환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 스며든 환대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것이다.
지난 주 저는 1시간학교 식구들과 함께 백석동 13블럭 극장에 가서 연극을 봤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깜작 놀랐습니다. 그 연극의 제목은 ‘돌아오는 화요일’인데요, 그 연극에는 하루라는 시간동안 서로 불통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환대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묘한 위로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17명의 청년들과 함께 경기도의 아름다운 7개의 휴양림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10명만 뽑으면 되지만, 저는 더 많은 친구들을 뽑아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 친구들과 제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렁텅이를 넘을 수 있는 것은 ‘환대’하는 삶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맛있는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일인데요, 나름 그것은 저에게는 천국가기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저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권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확인합니다. 구원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멀리 있는 길이 아니라 내 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향한 환대의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높은 담과 구렁텅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이웃과 이웃 사이에도, 심지어 가정과 교회 안에도 건널 수 없는 거리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거리를 환대의 사랑으로 메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작은 일상에서 실천하는 한 끼의 식사 대접, 따뜻한 말 한마디, 마음을 열어주는 작은 친절이 우리 삶의 구렁텅이를 메우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곧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문 앞의 나사로를 외면하지 않고, 작은 환대의 손길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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