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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주는 사랑설교 2025. 8. 24. 09:51
설교 제목: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
본문: 누가복음 13:10-17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매일의 삶 가운데서 누리시고 기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1. 허리를 펴지 못한 여인
여러분, 혹시 허리가 아퍼서 일상생활에 힘들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저는 몇년 전에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몇달간은 힘들게 지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허리가 아파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시니 제가 오늘 하는 말씀에 대해서 잘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에 나오는 주인공을 허리가 아파서 18년동안이나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서는 그녀가 단순하게 허리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허리가 굽어서 조금도 펼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가 ‘회당’이었는 점에 있습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18년동안이나 그 회당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 또한 그 여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 오랫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났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뭔가 표현이 어색하지 않습니까?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환자분, 이제는 완치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될 것을 예수님은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났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병에서 풀려났다고 말할 때의 동사는 ἀπολύω’(아폴루오)가 사용되었는데요, 이 표현은 노예가 해방되었을 때, 죄인이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단순하게 완치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고통에서 풀려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의 몸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분개한 회당장의 말못할 사연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또한 기쁜 일입니다. 18년동안 이나 고통을 겪던 여인이 고침을 얻고 자신을 억누르던 고통에서 해방을 얻은 사건이니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두개의 감정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이들은 기뻐했지만, 회당장과 함께 한 이들은 분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분노의 상대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회당장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나 있지 않소? 안식일에는 고침을 받지 마시오.” 그런데 이 말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향하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은 여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안식일에는 고침을 받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기준,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 따르면 병을 고치는 행위도 노동이니, 그것도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8년동안 허리가 펴지지 않아서 굽은 허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데 안식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끌고 나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었는데,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안식일논리가 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기뻐하며 오늘의 본문이 끝나고 있습니다. 니다.
3. 이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이다!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쳐선 안 될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의 딸이 아니냐?” 헬라어로 “튀가테르 아브라암(θυγάτηρ Ἀβραάμ)”, 이 표현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유일한 표현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자손”(σπέρμα Ἀβραάμ)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되던 말이지만, 대부분 남성 중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병들고 굽은 몸을 한 이 여인을 하나님의 백성, 언약 안에 있는 자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십니다.
그 순간, 그녀는 단지 병에서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회복되고, 공동체 안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회당장은 그녀를 18년 동안 함께 지내고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통, 사연, 눈빛을 외면했습니다. 이미 그녀를 저주받은 존재, 밖에 있는 자로 결론 내렸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마디로 그 오랜 편견을 무너뜨리십니다. “이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이다.” 곧 “하나님은 너를 기억하신다. 너는 잊힌 존재가 아니다.” 이 한마디가 그녀의 굽은 허리를 펴게 하고, 이름과 존재를 복권(復權)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녀가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헬라어 δέω(deo), 곧 결박되다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이는 단지 육체의 병이 아니라 영적 억압, 사회적 배제의 상태에서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진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사랑의 힘: 보다, 말하다, 터치하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간단히 말하곤 합니다. “역시 예수님은 능력이 많아!”, “예수님께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나지!”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신의 아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런 ‘전능의 드라마’로만 읽는다면, 이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된 사랑의 기적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분은 먼저 ‘보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여인을 바라보셨습니다. 회당장이 18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그녀를 예수님은 ‘먼저’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났소.” 단순한 치유 선포가 아니라, ‘해방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곧 그녀의 굽은 인생에 대한 선언이었고,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자신이 18년동안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예수님을 통해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손을 얹어’ 만지셨습니다. 여러분, 고대 사회에서 여성을 만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정하게 여겨지는 여성을 만지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금기였고,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얹으셨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그 사랑이, 눈으로 확인하고, 말로 선포하고, 손으로 안아주는 구체적인 사랑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몸이 회복된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도, 영혼도, 사회적 지위도, 종교적 소속감도 함께 회복된 것입니다.
5. 오늘 이 시대의 굽은 이들에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회당, 곧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의 회당장은 누구입니까? 누가 복음이 전해져야 할 사람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누가 굽은 자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이 질문 앞에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자녀만 그런 줄 알았는데,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요즘 아이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어른들 눈에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고, 문을 잠그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30~40분씩 혼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방을 찾아 화장실로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부모들은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그 말은 사실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정말 끔찍히 사랑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랑이 자녀의 눈높이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틀과 기준에 따라 주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끌어안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 사랑이 버겁고 무겁고 때론 고통스럽다고 느끼곤 합니다. 아이들의 굽은 허리는 그 누구도 몰래, 아주 오랫동안 꺾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진심으로 바라봐 주고, 터치해 줄 때까지—아무도 그 고통을 알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6. 결단과 초대 —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
저는 내일 새로운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고립은둔으로 힘들어 하는 친구들 15명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들을 만나 면접을 진행했는데요, 한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 말에 저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여인이 제 마음에 겹쳐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여인은 성서 안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이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굴곡 속에, 굽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대해주고 바라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복음의 본질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여인을 보셨고, 사람들이 꺼리던 여인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그녀의 몸에 손을 얹어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바라보았고, 사랑이 말을 걸었고, 사랑이 손을 내밀었을 때, 18년의 굴곡진 인생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말없이 굽은 허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지 병 때문이 아니라, 외면당하고, 단정지어지고, 판단받으며 굽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도 아브라함의 딸 아니냐?”
“그도 하나님의 자녀 아니냐?”
그렇게 한 사람의 존재를 회복시키는 언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할 복음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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