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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룩한 분노와 우리가 가야 할 길
    설교 2025. 8. 16. 22:00

    제목: 거룩한 분노와 우리가 가야 할 길
    본문: 누가복음 12:49–56

    1. 서두 – 예수의 낯선 얼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사실 이번 주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고양시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교회가 이 자리에 세워진 지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렇게 많은 비가 쏟아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한 가지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의 모든 빗물이 결국 우리 교회 앞으로 몰려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골목이 강처럼 변했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과 맞서느라 온몸이 흠뻑 젖었고, 그 뒤로는 감기까지 얻었습니다. 밀려드는 물살 앞에 서 있으니, 마치 이 세상의 고통과 눈물이 한꺼번에 우리 앞에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그 물살처럼, 세상의 문제는 결국 우리의 삶을 덮치고, 교회의 문 앞까지 밀려옵니다. 어쩌면 빗물처럼 세상은 지금 우리 교회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이 눈물과 아픔 앞에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느냐?”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얼굴도 낯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평화롭고 자상한 예수가 아니라, 불을 던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낯선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이 낯선 얼굴은, 세상이 교회 앞에 몰려드는 물살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당황하게 만듭니다.

    2. 불과 세례 – 홀로 감당해야 할 길

    예수님은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예수님은 이미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시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은 단순히 다시 물에 잠기는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재세례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는 곧 그분이 걸어가야 할 길, 십자가의 길, 피와 눈물로 감당해야 할 운명을 말합니다. 세례란 단순히 교회에 들어오는 통과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결단의 표지입니다. 예수님께 그 길은 이미 피어오른 불과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감당할 수 없는, 오롯이 홀로 걸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의 마음에는 답답함과 괴로움이 밀려왔습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있는데, 그 길을 함께 알아주고 동행해 줄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일에 관심을 두고, 그 길의 의미를 묻지도, 짐작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3. 분열을 불러오는 말씀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둘로 셋으로 갈라질 것이다.” 왜 이런 과격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정말로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들이 서로 척지고 다투기를 바라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복음서에서 비슷한 장면을 봅니다. 예수님이 길에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께 인사하고 난 뒤에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가족 간에 마땅히 해야 할 도리까지 거절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가족을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반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만 갇혀 있으려 했기 때문에, 그 틀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하나님 나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 울타리를 넘어, 더 큰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모두 가족의 일, 가족의 안위, 가족의 행복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것이 너무 답답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성서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식구가 되리라.” 기독교 신앙은 결코 가족주의의 연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주의를 넘어, 더 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4. 오늘의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위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단지 2천 년 전 유대 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히 깊이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을 보십시오. 겉으로는 부와 힘을 자랑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노숙자들은 갈 곳을 잃고 길바닥을 떠돕니다. 도시의 중심부에 텐트촌이 들어서고, 다리 밑에는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도심 외곽에 캠핑카들이 즐비한데, 그들은 살집이 없어서 캠핑카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들은 왜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가정이 해체되고, 그들을 붙잡아 줄 공동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의 시작은 바로 극단적인 가족주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비해서 사회의 공적시스템이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가 강하다 보니, 그런 칼끝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 가족 중의 한 사람만 실직을 하더라도 모든 가족이 길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이 무너지면, 그들을 받아줄 더 큰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니 사람들은 길거리에 버려지고 맙니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양극화가 가져온 비극입니다.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논리가 너무도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마저도 가족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때로는 가족의 확장판, 사적 이익을 지켜내는 울타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신앙은 가족주의의 연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너머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5.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부르심

    그렇다면,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곧 가족의 안전망을 넘어서는 더 큰 품을 말합니다. 가족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전부는 아닙니다. 가족들의 영적 구원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이 무너질 때, 혹은 가족조차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더 깊고 넓은 품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길거리에 내몰린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고아에게는 부모가 되며, 이방인에게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한 가족이 된 이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더 큰 품 안에서 서로를 이어주는 이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맺어진 관계의 언어가 바로 ‘형제, 자매’입니다.

    6. 때를 분간하는 지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날씨는 기막히게 맞춥니다. 비가 올지, 해가 날지, 바람이 불지 예측합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징조를 보여주시는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계 보듯 시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어떤 시대인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단순한 날씨 예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국가 통계청과 여러 연구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절벽, 청년 세대의 고립과 은둔, 심화되는 경제적 양극화,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 그리고 가족 해체의 가속화. 가정이 더 이상 든든한 안전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정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백 앞에서 교회가 답을 내어야 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입니다. 교회가 가족주의의 또 다른 확장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더 큰 품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은 오늘 우리를 향합니다.
    “너희는 이 때를 분간하고 있느냐? 너희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시대 상황을 알아차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7. 결단과 초대 – 거룩한 분노와 우리가 가야 할 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낯섭니다.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시고, 감당해야 할 세례의 길을 말씀하시며, 심지어 가족 안에서조차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답답함, 때로는 짜증과 분노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우리를 향한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여전히 작은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족주의에 갇혀, 더 큰 하나님 나라의 품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흔들고 깨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던지신 불은 파괴의 불이 아닙니다. 절망과 고통의 재 위에서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불입니다. 낡은 울타리를 넘어, 더 큰 공동체로 초대하는 불입니다. 꺼져가는 생명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촛불, 작은 연탄불과 같은 빛. 스스로를 태워 누군가를 덥히고 밝히는 불. 그 불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힘든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한 삶은 더 큰 문제입니다. 태워서라도 밝힐 불이 없는 삶, 그 불꽃을 발견하지 못한 삶이야말로 더 깊은 어둠일지 모릅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불이 되었느냐?”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주어진 불은 바로 이 거룩한 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향해, 누군가의 삶을 밝히고 덥히는 불. 그 불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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