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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야, 이제 내려놓으렴설교 2025. 7. 20. 10:51
마르다야, 이제 내려놓으렴
본문: 누가복음 10:38–42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각자의 삶에 깊이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한 주, 전국 곳곳에 쏟아진 많은 비로 어려움을 겪은 이웃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시작에 앞서, 그분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잠시나마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삶이 속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위로가 닿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어느덧 2025년도 절반을 지나 7월의 중턱을 넘고 있습니다. 해가 바뀐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시간이 빠르다는 말, 이제는 너무 익숙한 문장이 되어버렸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누구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예배하는 이 시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초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깊이 조명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화가난 마르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정성껏 모신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두 이름은 교회 안에서 아주 익숙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을 통틀어
가장 많이 쓰이는 이름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르다선교회’ ‘마리아선교회’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지요. 대개 마르다선교회는 연배 있는 여성 교우들로 구성되어, 교회의 중심적이고 중요한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 모습이 성서 속 마르다와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책임감이 강하고, 일이 보이면 먼저 움직이고, 누군가의 뒤를 받쳐주는 사람들이 바로 ‘마르다’일 것입니다.
성서에서도 마르다는 언니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했고, 아마도 그녀는 잔치를 준비하며 마음을 다해 섬겼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이 오셨고, 사람들이 모였고,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원했던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마음은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마르다는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기쁨이어야 할 순간이, 불편한 감정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놀랍게도 자기 동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자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가만히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면 어땧을까요? 그녀는 아마도 그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동생 마리아가 앉아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작성하는 가운데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배가 아플까요? 아마도 사촌은 어린 시절부터 나와 경쟁의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들에 비해서 더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그 가운데 뗄래야 뗄 수 없는 경쟁의 관계가 형성된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땅을 사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자신의 비추는 거울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일 사랑하는 동생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마치 ‘사돈이 땅을 산 것’과 같은 기분이 든 것이 아닐까요?
사실 저도 그런적이 많습니다. 커피트럭에서 일하면서 제가 제일 가기 싫어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세미나를 하는 자리에서 커피트럭으로 가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싫습니다. 다른 세미나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나도 그곳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작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라고 잠깐 동안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르다의 경우에는 분노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심리학에는 ‘미러링’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주로 부모와 자식관계 그리고 형제와 자매의 경우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서로를 하나의 거울과 같이 인식을 해서 상대방의 어떤 모습 속에 자신을 투사하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거울처럼 미러링을 하는 것은 사실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론 이것이 질투와 대립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르다가 마리아를 보았을 때의 그 감정은 이러한 미러링효과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의 그녀의 마음 속에 이런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왜 나만 이러고 있지?” “마리아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예수님은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거지?” 결국 마르다는 예수님께 터뜨립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0절)
이 말에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이 뒤섞인 항의가 담겨 있습니다. 기쁨과 자부심으로 시작했던 일이 비교와 억울함으로 바뀌어 예수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려놓지 못한 마음,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
마르다의 말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속으로 끓어오르던 감정이 “왜 나만?”이라는 질문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욕망의 근원에는 모든 일의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서서히 마음 깊은 곳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앉은 모습을 통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그녀의 옆에서 함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어땠을까요? 아마 그렇다면 오늘 이 이야기는 성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오롯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는 말씀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통해서 마르다와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41–42절)
예수님의 반응: 빼앗기지 않을 것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다정하게, 조용히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아마도 이것은 마르다의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것도 두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고, 그것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괜찮아, 너도 잘했어. 너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잖아.” “마음은 알지만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위로하거나 적당히 공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말 속에 숨겨진 핵심을 정확히 보셨습니다. 마르다는 단지 억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마리아가 택한 그 좋은 것—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듣는 은혜의 자리를 빼앗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소 냉정하게도 느껴집니다. 마르다가 마리아로 하여금 나를 돕도록 해달라는 말이 회피인 것을 예수님은 이미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집에 오셨고, 이제 말씀을 시작하셨으니 이제는 일할 시간이 아니라, 일을 멈추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았지만, 마르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마르다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인지시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은 빼앗길 일이지만,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했고 빼앗기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또한 다른 이유로 인해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르다 VS 예수
그런데 여기에 마르다와 예수님 간의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로 부터 외면당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와서도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을 한다는 것은 감정적 동의나, 신학적 동의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함께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결단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제자의 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집회가 열린 것은 마르다가 그 마음을 가지고 초청을 한 것인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험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잔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를 예수님에게서 떨쳐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씀을 듣기 위한 자리 마저도, 자신이 주도를 하는 일터로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터에서 예수님은 들러리가 되고 마르다가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가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이유일 것입니다.
Let it be – 그대로 두어라, 내려놓으렴
마르다는 자신이 초대한 자리를 자신이 주도해야 하는 자리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했고,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기 방식’을 놓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를 일터로 바꾸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준비한 판 위의 손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일터에서 예수님은 들러리가 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르다가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자신이 중심에 있어야만 하는 마음—그 마음이 그녀를 분주하게 만들고, 결국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다정하게,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두 번 불러주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눅 10:41-42)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주님은 지금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고, 그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토닥이고 계십니다. “그래, 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괜찮아. 너의 마음을 내가 안다. 지금은 한 가지만 해도 괜찮단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실 그 노래—비틀즈의 ‘Let it be’**입니다. 그 유명한 구절이 이렇지요.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저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노래가사에 나온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노래는 비틀즈가 스튜디오 녹음을 한 마지막 노래라고 합니다. 이별곡과도 같은 노래입니다. 당시의 폴메카트니와 비틀즈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팀해체로 이어지게 되었는데요. 어느 날 폴매카트니의 꿈속의 그의 어머니 매리가 나와서 해준 말이바로 ‘let it be’라고 합니다. 그 말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불후의 명작인 된 것입니다.
Hey, Marda!
그런데 저는 또 한 곡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 노래 역시 비틀즈의 곡인데요, 바로 Hey Jude입니다. 이 노래는 폴 매카트니가 친구였던 존 레논의 어린 아들, 줄리언 레논(Julian Lennon)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마음이 아팠던 아이에게, 매카트니는 이 노래를 통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죠.
“Hey Jude, don’t make it bad /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Remember to let her into your heart / Then you can start to make it better”
저는 이 노래가 이렇게 들렸습니다.
헤이, 마르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 너를 괴롭게 하던 것들, 이제는 놓아줘.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마음을 열어봐—그때 비로소, 진짜 소중한 걸 찾게 될 거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상황이 바뀐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많은 문제들이 결국에는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마음’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의 수많은 우울증의 문제는 결국 자녀를 향한 부모들의 마음에서 부터 옵니다. 그 마음은 결국 사랑의 마음인데, 그 사랑의 마음이 자녀를 속박하게 되고 결국 관계가 깨지게 되고, 자녀들은 평생동안 그 마음의 상처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 가운데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은 바로 Let it Be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택한 빼앗기지 않는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내려놓고, 일을 내려놓고, 분주함을 내려놓고 우리는 자신과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문제를 내려놓고, 그분에게 답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로 분주하고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 분주한 관계는 우리를 더 어렵고 분주하게만 만들 것입니다. 마리아 처럼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빼앗기지 않을 유산으로 부터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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