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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희도 그와 같이 하여라설교 2025. 7. 13. 10:44
가서, 너희도 그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25-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깊은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분명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것은 현대교회가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는, 가장 반대편에 자리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런 염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이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교회에서 전하기 어려운 메시지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도전적인 말씀 앞에 서고자 합니다.
영생을 묻는 마음의 깊은 곳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율법교사의 이 질문을 들으며 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분명 진지했을 것입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삶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일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깊은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걸까? 내 신앙이 진짜일까?’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의 질문 안에 이미 신앙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율법학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완벽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님도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배제의 논리
율법교사는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속에는 우리 모두가 가진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의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까지는 사랑해야 하지만, 저 사람은 아니어도 되겠지’ 하는 계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들으시며 율법교사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웃’의 범주 안에는 이미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율법교사에게 ‘이웃’이란 같은 유대인,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혼혈족’, ‘이단자’, ‘더러운 자’로 분류되어 사랑의 범위에서 완전히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운 신자라고 자부했던 그들의 사랑이란 결국 배제를 전제로 한 자기들끼리만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역전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험한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청중들은 긴장하며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까?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또 다른 종교인마저도 똑같이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이 불쌍한 사람을 피한 이유는 모두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에 놓인 사람을 방치하는 일에 그들의 종교적인 해석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청중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금기를 재현하는 일의 서막이 열리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긴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 주인공을 사마리아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맞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닌 그거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마리아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고 혐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이웃’의 범주에서 이미 완전히 배제했던 바로 그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측은한 마음” - 진정한 사랑의 시작
그런데 그 이유를 예수는 종교적인 언어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이 타인을 향해서 품은 마음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은 내장, 창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깊은 공감,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마음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느끼셨던 그 마음,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느끼셨던 그 마음,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느끼셨던 그 마음이 바로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바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지위나 사회적 명성과는 상관없이, 교리와 신학과는 상관이 없이 고통받는 사람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지상정이라고 할텐데 이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을 시킵니다.
저는 이 단어를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나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을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았을 때 진정으로 내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아파하는 마음이 있을까? 우리는 때로 머리로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사랑해야지’, ‘도와줘야지’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아마도 죽음의 위기를 맞은 사람을 만난 종교인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마음을 막은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신념과 교리 때문이었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바로 이런 ‘σπλαγχνίζομαι’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시고, 우리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처럼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아픔을 보게 되면 한없이 무너지고 아파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감정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비용을 지불하고, 지속적인 돌봄까지 약속했습니다. ‘σπλαγχνίζομαι’에서 시작된 마음이 그의 온 일상을 체우고 그는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을 했습니다. 그는 말로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의 완전한 역전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마치시고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율법교사의 원래 질문을 완전히 뒤바꾼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로 말입니다.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어쩌면 율법교사는 예수님과 종교적인 토론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영생’이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현생에서 누리는 기득권의 삶을 영원토록 연장하는 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 영성을 넘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개인적 영성 추구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만의 하나님과의 관계, 나만의 영적 체험, 나만의 신앙의 깊이,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핵심은 다릅니다. 진정한 신앙은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로 드러납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실천과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Stairway to heaven’은 역설적이게도 이웃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묻는 것은 결국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기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강도 만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저는 문득 깨닫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가족들이 어쩌면 가장 먼저 우리의 측은한 마음이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을 너무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를 잘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가족 중에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지쳐있는 남편이나 아내, 학업과 진로 고민으로 불안해하는 자녀들, 건강 문제나 외로움으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 이분들이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대상일지도 모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σπλαγχνίζομαι)’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거창한 영웅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열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위로의 말 한마디, 함께 나누는 따뜻한 식사 시간, 힘들 때 조용히 내미는 손길… 이런 작은 것들이 가족에게는 생명의 밧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가족을 넘어 이웃으로, 지역사회로,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경고: 필리핀 교회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사적 교훈을 돌아봐야 합니다. 필리핀은 1960년대 한국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인구의 86%가 가톨릭 신자인 아시아 유일의 기독교 국가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필리핀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처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파고들어가 보면,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가톨릭교회가 만들어낸 권력구조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교육을 독점하고, 토지를 집중시키고, 시민들의 발전 기회를 의도적으로 제한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마을의 모든 권력을 쥐고, 백성들을 종속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사장과 레위인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강도 만난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가해자였습니다.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교육권, 토지권, 정치참여권을 체계적으로 박탈하고 착복한 것입니다.
필리핀 가톨릭교회는 후에 “내부 식민주의의 죄”라며 책임을 사회 전체로 돌렸지만, 이는 자신들의 직접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우리는 강도만난 자들의 이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함께 돌아보고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니고,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는 많은 순간 선한 사마리아인보다는 지나가는 제사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의 일탈”이라고 하며 구조적인 성찰을 피하고 싶어했고,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하며 교회 자신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싶어했습니다. 막상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싶어했습니다. 개인적 영성 추구에만 매몰되어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기도 했고, “교회 성도들”만을 진정한 이웃으로 여기며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볼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에는 정죄가 아닌 격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너도 할 수 있다. 너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께 선포하면서 동시에 저 자신에 대한 반성문으로 읽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인 동시에 법인회사의 대표로서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들을 청년들과 교인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따라오지 못하는 교우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필리핀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부와 권력을 증식시켰듯이, 제 삶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자각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서, 너희도 그와 같이 하여라”
우리가 지금까지 완벽하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과거의 실패는 미래의 가능성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치유자’입니다. 완전해진 후에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 서로를 치유해가며 함께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를 나무라지 않으셨고, 그가 이제 다시 걸어야 할 영생의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삶 가운데서 만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을 영생으로 이끌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께서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묵묵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부모님들, 어려운 이웃을 조용히 돕는 성도들,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애쓰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누가 내 이웃인가?” 묻지 맙시다.
더 이상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려 하지 맙시다.
더 이상 누군가를 처음부터 배제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가서, 너희도 그와 같이 하여라.”
오늘 내가 만나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σπλαγχνίζομαι)으로 다가가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을 실천하는 것, 교회의 기득권보다 이웃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제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번 주 한 가지만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중 한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σπλαγχνίζομαι)’으로 다가가 보십시오. 그 작은 변화가 우리 가정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함께 이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부터, 지금부터, 내가 만나는 그 사람부터 시작합시다.
설교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사마리아인과 같은 측은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고통받는 이웃을 피해 지나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말로만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되게 하시며, “가서, 너희도 그와 같이 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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