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누가복음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매일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누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한해가 오늘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간의 출발을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 대림절의 클라이막스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의 처음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탄생을 기뻐하는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충분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조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서는 그 날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어떤 날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게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다윗의 가문에서 한 의로운 가지를 돋아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예루살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 날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예언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은 바로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과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날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방탕함과 술취함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것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술취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 준비를 하지 못하는 방탕함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아무 준비도 없이 흥청망청 살아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일 그 날이 안온다면, 아니면 그 날이 어떤 사람에게만 닥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날은 꼭 올 것이며 그 날은 온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조심을 하고 이 모든 일들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무엇인줄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걱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걱정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불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걱정을 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래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만으로 보자면 걱정을 하는 것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동격인 것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믿음의 반대말이 바로 ‘걱정’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걱정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 이교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세상 살이의 걱정이라고 오늘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도 자신들이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리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이 차려입은 것보다 더 화려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시는 하나님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깨어서 기도하는 것의 반대말이 바로 ‘걱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살이의 여러 가지 일들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반대말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 가운데, ‘적정도 팔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사실은 신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팔자를 믿었습니다. ‘사주팔자’를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 마다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자면, 걱정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이 타고난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걱정을 하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걱정’을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열렸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열릴 것이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시간과 그 나라를 바라보려면 우리는 ‘걱정’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스스로 깨어나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걱정’이 아니라, ‘믿음’에 돋을 내리고 이제 기도하면서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 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걱정을 하지 않고, 기대를 가져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내어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