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것인가? /2024년 5월 12일 참포도나무교회 신앙공동체 예배 설교문
나는 누구 것인가?
요한복음 17:9~19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의 삶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매일 매일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난 주 수요독서 때 읽은 책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언어는 시간에 대한 순수한 우리 말입니다. 그런데 내일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 말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찬송가를 인용하면서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하루 하루를 완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곧 유언과 같은 성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은 남겨진 삶에 대한 분배를 규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유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남겨주고자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언에서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한 가지는 남은 유산에 대한 분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를 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유언 안에도 소유에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서로 하나가 된 것 같이 서로 하나가 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비록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기쁨이 그들에게 넘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쁨이 그들의 삶에 넘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바로 진리 가운데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매 주일 마다 성서를 읽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도 진리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의 삶이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의 골격 가운데 들어있는 뼈대가 있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오늘 설교 제목으로 삼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유언을 담고 있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지표 3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서로 하나 되기를 힘쓰며, 진리로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리되어야 할 삶의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누구의 소유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나의 소유이다!”, “당연히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교육과 미디어는 자신의 삶의 소유자로 당당하게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이유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젊은이들일 똑똑해 지고 현명해 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부부의 소득을 따로 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뿐이다!”라는 생각이 그 자리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당신이 누리신 자유하는 삶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성서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산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남은 유품이 몇 가지가 있지만 그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우리들에게 당신의 그 정신만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당신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소유는 사실 그것들을 점유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참으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불온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로마의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권을 상실한 채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신들을 추켜 세웠지만 사실은 가이사의 백성으로 가이사의 것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주장했던 바리새파 인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종교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레위인들도 사실은 가이사의 세상 속에서 가이사의 것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속된 존재, 세상의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존재들임을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신도들 가운데서는 종의 신분으로 살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한정적이였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재산이었기에 독립적인 존재로 자유로운 신분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이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은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지는 지위와 존재에 대해서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영적 실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와 평가로 그 사람을 저울질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이 말은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는 욕심들이 있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그것은 이 세상에 모든 것, 즉 나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또한 이 말씀은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타인과 때어내서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셨고, 당신이 만난 이들을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로 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한 신학대학에서 이른바 “유신진화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한 교수님에 대한 징계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저는 이것이야 말로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마녀사냥을 펼치는 이유는 그 안에 빈약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창조론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신앙’이라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화론과 창조신앙은 모두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에 대해서 찬성하는 사람들도 사실 진화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진화론’이란 것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에 대한 논쟁만큼 소모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논리로 ‘창조론’, ‘창조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그런데 사실 ‘창조신앙’을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는 그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것을 고백하면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유신론, 창조론, 창조과학을 말하는 이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나서 섬기고 함께 살았던 모든 이들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하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관계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관계들과 사람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존귀한 사람들인 것을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거룩하게 대하고 섬긴다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달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창조신앙’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주 부산영화제에서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씨가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언론과 인터뷰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8100억을 사회에 기부한 것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기부하지 않았습니다.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이니까요! 제 아내가 기부했습니다. 저는 사실 얼마를 기부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윤발씨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빈몸으로 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갈 때도 아무것도 없이 빈몸으로 갈꺼예요. 저는 하루에 쌀밥 2끼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사실 요즘에는 당뇨 때문에 하루에 쌀밥 한끼만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 고백을 들으면서 욥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노하고 좌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주윤발씨도 좌절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생각의 믿에는 이렇게 욥의 고백과 같은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옳은 쪽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참포도나무교회 성도 여러분, 몇 년 전부터 우리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 많은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자신이 버는 모든 돈을 은행이자로 내면서 텅 빈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자리가 없어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을 보면서도 깊은 연민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때 일수록 제대로 자신의 삶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은 바로 오늘 제가 드린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다”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