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두려움과 긍휼 / 출애굽기 2: 11~25

if i could 2023. 7. 31. 22:26

11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12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13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14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15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22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23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25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세 

모세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의 삶 전체를 붙들게 된 하나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모세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서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곳에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인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던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삶의 시작이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두려움은 뿌리가 깊습니다. 사실 그 두려움은 바로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괴롭히게 된 것도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전혀 근거가 없는 두려움은 아니였고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두려움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그는 히브리인들을 인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바로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오히려 이 두 민족간의 화해의 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두려움의 감정이 살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는 사람을 죽인 뒤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는데, 자신이 한 행동이 들통이 난 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곧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의 감정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살육하는 삶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바꾼 이들이 바로 히브리 산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 

 

말하자면 신앙은 두려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어려움과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민족은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의 삶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이리 저리 부유하면서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고대근동의 무역과 전쟁에 기대어서 떠돌아다니던 유랑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세겜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 세겜조약의 핵심은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망자의 삶, 모세가 미디안광야로 도망을 가다. 

 

우리는 이제 모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의 삶은 강가에서 시작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가에 홀로 던져진 존재가 바로 모세의 생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맞이하게 된 운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이후에 바로의 딸에게 입양이 되면서 '이집트의 왕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대해서는 성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장소로 삶의 거처를 바꾸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 살던 광야였습니다. 르우엘은 그곳에서 딸들과 함께 양을 기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광야로 나간 모세는 그곳에서 르우엘의 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목자들과 분쟁에 빠진 르우엘의 일곱딸들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광야는 항상 물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은 서로 쟁취하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항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모세가 목자들과의 분쟁에서 딸들을 구해주고 그로 인해서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모세는 강한 생의 의지를 보이게 됩니다. 사실 그곳은 잠시 들른 곳이였을텐데, 성서는 모세가 기꺼이 그곳에서 살겠다고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르우엘에게 있어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르우엘은 자신의 딸중의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한 뒤에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의 일꾼으로 취직이 된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하나의 계약처럼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낮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모세는 미디안제사장 르우엘의 집에서 목동으로 오랜 시간을 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가 한 일가운데 주목있게 다루는 일이 바로 아이를 낳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제 모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뜻이 바로 모세의 이름이었고 그의 이름이 결국 그가 살아야 하는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의 아들의 이름에 대해서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았는데, 모세는 그 아이에게 "내가 낮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라는 이름으로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게르솜에게는 안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모를 유모로 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인이면서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겉으로는 이집트인이었지만, 속깊은 곳에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동족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에는 어떤 주저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던져진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 바로 바로 순응하고 행동에 나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의 삶은 살인자로 끝나고 말았고, 그는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료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히브리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게르솜'이라는 이름 자체는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곳 하나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떠도는 삶이 바로 히브리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곳으로 돌아가면 그는 곧 바로 잡혀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어정쩡한 마음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만족을 하지 못했고 또 정착하지 못한 체로 계속해서 떠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도피하여 광야에서 숨어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줄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고, 누이와 모친 그리고 바로의 딸까지 그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만난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위대한 과업을 이룰 십보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3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25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시간이 약이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의 두려움이 해결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사실 모세가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가 죽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간이 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손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된 일을 계속해야 했고 그들은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게 되신 것입니다. 그들의 탄식소리에 응답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식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약속이 오래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새로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그곳에서 부터 옵니다. 

 

모세의 삶에도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삶은 미디안 광야에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향한, 아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이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왜 모세를 사용하셨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는 물론 살인자로 끝나게 되었지만, 그 일의 시작은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그는 모른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준 마음입니다. 곧 남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모세에게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모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타인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믿습니다. 저희가 1시간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1시간학교를 통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리교육을 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다만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1시간학교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게르솜과 같은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정붙여야 할 곳을 찾지 못해서 나그네로 떠도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영원히 안식할 곳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이 광야라는 학교를 통해서 그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