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 (김영운 목사) /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
노래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 (김영운 목사) /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
성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도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가장 훌륭한 상태의 기도는 역시 찬양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성서에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수없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새롭게 끄는 기도는 마리아의 노래 또는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이다. 찬미의 시(詩)이자 찬미의 예언이며 동시에 찬미의 기도가 바로 이 마리아의 찬가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노래로 이어지는 기도”이다.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누가 1:46~55)는 그 첫 단어가 라틴어 성서에서는 “하나님을 위대하신 분으로 찬양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본이나 주석에서는 이 노래가 엘리사벳의 찬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가로 확고하게 알려져 왔고 또 성서에 그렇게 실려 있다.
실상 마리아의 노래는 찬양의 기도이며 동시에 참회의 기도이다. 성서에 나타난 대부분의 찬미와 시가 기도라는 것을 확인하게 만드는 좋은 예가 된다. 이 점을 생각하다 보면 교회에서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도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렇게 때문에 찬송가를 부를 때면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불러야 하겠다는 생각이 새롭게 떠오른다. 어느 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찬송가(개편) 418장의 끝 소절의 “내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다”라는 가사가 끝났을 때 함께 찬송을 부르던 교우 가운데서 한 사람이 “정말 입니까? 우리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까?”하고 묻자 모두가 숙연해졌던 경험이 생각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찬송가를 부르면서 입 밖에 내놓은 말들을 이행하거나 실행에 옮길 의사는 전혀 또는 거의 없이 가사를 되뇌이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참회의 기도는 우선 우리의 죄를 인식하고 그 죄 때문에 우리는 구세주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죄가 많아도 그 죄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보좌로 나갈 길이 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발견된다. 감사와 찬양의 기도에서도 참회는 빠질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확인하게 만들어 준다.
이제 마리아가 이 노래를 부르던 상황과 배경을 살펴 보는 것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여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하고 말하였을 때 마리아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천사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처녀에게 하는 말이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하였을 때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얼마나 겁이 나고 놀라왔던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거부하였을 정도였다.
성화(聖畫)를 그린 역대의 화가들은 그래서 천사에게서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들었을 때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방 구석으로 몸을 피하여 웅크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마리아를 그린 것이 전통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그러나 천사가 계속해서 위로를 하며 엘리사벳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자상하게 일러 주었을 때 결국 천사의 말에 승복하면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던 설레임의 회상이 너무 강렬하게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가 말하던 것이 그대로 엘리사벳의 입을 통하여 확인되었을 때 마리아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이어서 이런 감동적인 기도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상태가 정말 신앙의 경지이다. 그분이 주님이시기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무엇을 해주셔서 감사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높은 차원의 감사이며 찬양이다. 나의 주님이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만날 때 그분의 품안에 덥석 안기는 기쁨이 왜 크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의 상태를 발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내가 찬양하는 분의 위대하심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날수록 나의 보잘 것 없이 “미천한 신세”가 더욱 확실해 진다. 칠흑처럼 어두운 데 있을 때에는 나의 추한 몰골이 문제도 되지 않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불끈 솟아 대지를 눈부시도록 환하게 비출 때 나의 미천한 모습이 너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미천함이 확실해 질수록 그분의 밝으심과 위대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나의 낮고 천한 모습이 확인될 때 미천한 신세를 돌보시는 분에 대한 고마움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그지없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천한 나를 돌보신다고 생각될 때에 느껴지는 축복이 얼마나 컸겠는가?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은덕을 생각하면 할수록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고 할 터이니 얼마나 그 기쁨이 크겠는가?
바로 이런 경지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 느껴져서 찬양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이처럼 거룩한 분에게 무엇을 요청하기보다는 오로지 그분이 주도권을 쥐시고 “자비”를 베푸시기만 기다릴 뿐이고, 또 그분의 자비를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른 누구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구세주의 자비, 전능하신 분의 자비, 그리고 거룩하신 분의 자비가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다른 무엇을 바라겠는가? 다만 그분의 자비에 우리의 온 몸을 던져서 우리의 온 존재를 내맡기는 일이 남을 뿐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노래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런 노래를 하는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나오는 노래,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가 지닌 독특성이다.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야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런 시가 동시에 마리아의 노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그는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죄는 그것을 깨닫고 회개할 때 사람들을 은혜의 보좌로 이끌어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로르던 시(詩)가, 설레는 가슴 속을 뚫고 용솟음치던 노래가 이제는 새로운 차원의 기도로 바뀐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언이다.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예수를 통하여 베푸신 주님의 자비에 대하여 예언을 한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도렬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인가! 오만한 자들의 콧대를 꺾으시고 무엇이 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 자들은 설 곳이 없게 만드신다니 ! 그 뿐인가?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니 쭉지 떨어진 독수리가 아닌가? 똑같은 사람이면서도 권세를 쥐고 있는 동안은 저희들만 별난 사람들 같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저희들의 도구처럼 취급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자들을 내치셨을 때 그들의 몰골을 상상해 보라! 그 다음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그래서 권세 있는 자들에게 밀리고 치여서 언저리로만 돌 수밖에 없었던 “병신들”이 높임을 받으니 새 세상을 만난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허기가 극심하면 아무 것으로라도 배만 불리면 되는데, 금상첨화격으로 “좋은 것으로” 배불리다니 생각만 해도 춤이 덩실덩실 나올 판이다. 그리고 부자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싶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은총이 폭포소처럼 쏟아지는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마리아는 벅찬 감동에서 대대로 베푸신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고 영원토록 이어질 하나님의 자비를 예언하는 속에서 찬가를 끝맺는다. 덩달아서 신나던 우리가 이제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마리아의 찬가를 노래해야겠다. 그 감동, 그 기쁨이 오히려 착 가라앉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천천히 솟아오르는 것을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 노래가 찬미가 되고 그것은 다시 시로 이어지더니 끝내는 예언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어찌 감히 마리아의 찬가를 함께 부를 수 있을까마는, 주님의 자비를 힘입어 함께 입을 벌려 보자.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