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기도
요나의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 김영운 목사 / 낭독과 해설 : 안준호 목사(참포도나무교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려다 “사흘 날.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의 이야기는 옛 이야기의지만, 구약에 나오는 그 어느 이야기 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나서의 내용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아주 가깝다는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요나서의 중심 주제는 어느 민족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자비를 배푸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이 세대가 표징을 구하나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요나의 이야기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다.
요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으로 어리석고 우둔함을 나타낸다(호세아 7:11)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줏대 없는 비둘기이다. 이집트를 보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더니, 어느새 앗시리아에게 달려간다.” (호세아서 7:11)
이것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인 줄 알면서도 그분의 낯을 피하여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려고한 점이라든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알면서도 그분이 이방민족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몹시 질투하여 화가 나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하고 투덜대는 점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1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2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1)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서 4:1~3)
이와 같은 요나의 인간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이 풍자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옛날의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요나는 어디에나 있다”(월프강 크뇌르저)고 하는 것처럼, 오늘의 “요나들”도 어리석고 둔하고 따라서 편협하고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어리석고 둔한 요나가 기도를 통하여 다시 살아난 것은 오늘의 “요나들”도 그와 같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요나는 그가 어리석고 둔한 뜻으로 엄청난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기도의 깊은 경지도 인도한다. 요나의 체험 속에는 참다운 기도의 표본이 담겨져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를 찾아볼 수 있다(2:1_9).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주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2 아뢰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 4 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1)'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5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6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7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8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2)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9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10 주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 냈다.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받은 요나는 예언의 은사를 받는 예언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말씀을 드러내고 선포해야 할 사명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도 당연히 신탁의 말씀을 선포했어야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이 선포하고 싶은 곳에서만 말씀을 선포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벌써 신탁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두 아들의 이야기”(누가 15:11-32)에 나오는 큰 아들이나,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25~32)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마태 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 종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재확인할 수 있다.
21 그 대에 베드로가 다가와 예수님께 여쭈었다. “주님, 제 형제자매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까지면 될까요?” 22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세요.” 23 “이렇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의 경우와 같습니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장부를 맞춰보고 싶어했어요. 24 장부를 맞춰보기 시작했을 때 한 사람이 끌려왔는데, 10,000달란트 빚진 사람이었어요. 25 그는 갚을 능력이 없었어요. 주인은 그에게 명령하여 아내든 자식들이든 가진 것은 뭐든지 다 팔아서 갚으라고 했어요. 26 그러자 그 종은 무릎을 꿇고 거듭 엎드려 절하며 빌었어요. ‘너그럽게 저를 좀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27 바로 그 종의 주인이 가슴 아프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었어요. 갚아야 할 빚도 없는 것으로 해주었어요. 28 그런데 바로 그 종이 나가서 자기와 함께 일하는 다른 종 하나와 마주쳤어요. 그 다른 종은 그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지고 있었어요. 그는 그 다른 종을 붙잡아 목을 조이며 말했어요. ‘빌려 간 것을 모조리 갚아라.’ 29 그러자 그와 함께 일하는 그 다른 종이 꿇어 엎드려 그에게 사정사정했어요. ‘너그럽게 나를 좀 참아 주시게. 그러면 갚아 주겠네.’ 30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나가서 그 다른 종을 감옥에 처넣었어요. 빚을 갚을 때까지요. 31 그러자 함께 일하는 또 다른 종들이 이런 일을 보고서는 몹시 괴로워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주인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다 설명드렸어요. 32 그 때에 주인이 그 종을 가까이 불러서 말합니다. ‘못된 종아! 내가 너의 그 빚을 다 없는 것으로 해주었다. 네가 나에게 사정사정하기에 말이다. 33 그랬으면 너도 너와 함께 일하는 다른 종을 불쌍히 여겼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나도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말이다.’ 34 화가 치밀어서 주인은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그 종을 넘겨주었어요.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요. 35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렇게 하실 겁니다. 그대들이 저마다 형제자매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마태복음 18:21~35) 새한글성경
오늘날 예수를 믿는 현대의 예언자들은 과연 어떤가? 예언을 하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선택해서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거나 회개를 위한 선포도 극히 제한해서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문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계신 곳과 안 계신 곳을 인간들이 결정한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누군가를 하나님이 징벌하셔야 할 것으로 인간들이 판단을 한다. 함께 싸우던 사람들이 싸움을 중단하고 기도를 함께 드릴 때에는 정말 싸움이 끝나고 화해가 이루어지는가 싶다가도 기도는 잠깐 동안의 휴전이었던 것처럼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시 맹렬하게 싸움을 재개(再開)하는 경우를 또한 종종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동들이 바로 오늘의 요나들의 행동이다. 그야말로 그들이 “다시스”로 도피하는 행위들이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명령은 니느웨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명령이며, 인간의 생각에는 니느웨가 백 번 천 번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비록 판단될지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예언자이기 때문에 니느웨로 가야한다. 그것은 신탁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할 명령이다. 이 명령을 거역한 옛날의 요나가 “다시스”로 도피하려고 하였다면, 오늘의 “요나들”도 그들의 “다시스”로 도망한다.
도피하는 요나,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만나기 힘든 그런 엄청난 기회, 곧 한 민족을 회개시킬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있는 큰 사명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다. 따라서 그는 기회와 더불어 주어지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드디어 그는 기도의 자리에 들어간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다. 믿음이나 기도가 원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줄은 알지만, 그런 원리가 지닌 뜻을 우리는 요나의 기도에서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작은 걱정이 있을 때에는 기도를 하지만 큰 걱정에 짓눌리면 기도를 안 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작은 문제가 있을 때에는 신앙으로 극복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그만둔다. 이런 기도, 이런 신앙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어떤 “요나”도 니느웨로 가는 길을 등지고 “다시스”로 갈 수 밖에 없다.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는 요나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를 구하시기 위하여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감히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회개에의 부름이다. 바로 이 은혜 때문에 요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기도의 이니시어티브는 하나님께 있다.
먼저 요나가 기도한 때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눈앞을 벗어나서 도망치던 요나는 “다시스”로 가던 배에서 무서운 풍랑을 만났다. 결국 자신 때문에 모두가 죽게 된 것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바다에 집어넣으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요나가 기도한 때는 바로 이런 때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진 때였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헤어날 길이라고는 바늘 구멍 만큼도 없이 꽉 막혀버린 때였다. 극한상황이라는 말이 오히려 모자람이 있는 그런 때였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요나는 기도를 하였다.
둘째로,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하였다. 숨 막히는 데서 기도를 하였다. 질식한다는 말이 너무 약한 표현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에서 기도하였다. 그곳은 죽음의 뱃속이요, 고뇌의 깊은 바다요, 땅 밑 메뿌리로 빠져드는 곳이었다. 그러니 기도를 못할 곳도 없다. 결국 요나는 “어느 곳”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자리가 가장(?) 훌륭한 기도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누구에게 요나가 기도를 하였던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다고는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거나 확인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독백이지 결코 기도는 아니다.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해야 한다. “야훼님”을 잊지 않고 빌어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낮을 피하고 눈앞을 벗어나려고 하였던 바로 그 하나님에게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훼, 나의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지 결코 이방의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가 결정된다.
끝으로, 요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였던 것을 회개하며 기도하였다. 다시스로 향하던 것에서 전적으로 돌아섰다. 그는 그래서 기도한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저버리지만, 저만은 이 고마움을 아뢰며 서원한 제물을 드리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고마움을 깨닫고 아뢰는 것이 앞서야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도 “죽음의 뱃속에서... 땅은 빗장들을 영영 내려 버렸는데도” 요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러면서 고백을 한다 : “저를 구해 주실 이 야훼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기도를 다시 한번 살펴볼 때 우리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극한상황 속에서 기도를 한다고 할 때 구태여 소리를 내서 기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도 그것을 단순히 죽음 후의 부활을 예표(豫表)한 것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신화 속에 묻어두기보다는 더 큰 의미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였던 죄와 하나님의 자비를 엄청나게 좁은 것으로 굳혀버리려고 하던 죄에서 죽음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편헙한 배타성(排他性)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일치시키는 기도가 나오게 된다.
이 세대에게 요나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스에서 돌아서서 기도를 하여야 하겠다.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는 찬양과 고백이 속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 그것을 말로 하든 소리 없이 하든 간에 진실과 성실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요나의 표징”을 몸소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도를 생각하다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친 화가난 요나
하나님은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나를 보냈습니다.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심판을 당할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선지자를 보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하나님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는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요나는 오히려 하나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에게 화가 나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장소는 어디인가?
우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로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도시간에 기도를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비로소 기도를 하게 된 곳은 바로 고래뱃속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목전에 왔을 때 그는 비로소 참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회개로부터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간구와 삶에 대한 결단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처는 바로 고래뱃속이었습니다. 그의 삶, 가운데서 가장 고립되고 외로운 곳이 바로 그의 기도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자리가 삶의 모든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반증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혼자서 운전을 할 때마다, 노동을 할 때마다, 커피를 탈 때마다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 가운데 힘을 얻곤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혼자서 지내는 곳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머무르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고래뱃속’입니다. 그곳에서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보다 뛰어 납니다.
고래뱃속에서 살아난 오냐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전체를 둘러보려면 사흘길이나 되는 니느웨를 하룻길을 걸으면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성의없게 선포했습니다. 만일 그가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하룻길이 아니라 사흘길을 걸으면서 선포하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만을 말했지 회개를 촉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의 그러한 무성의하고 무사랑한 선포에도 굵은 베옷을 입고 사회적인 회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이것이 못마땅해서 화가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니 도리어 화가났습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고 멸살되기를 바랬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의 심판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넓고 크시며 그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 우리는 요나의 기도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바라봅니다. 주님에게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기쁨보다는 오히려 화가나있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주님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했음을 고백하고 자복하게 하소서. 요나가 고래뱃속에서 비로소 기도를 했듯이 우리들도 죽음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게 하소서. 내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오로지 모든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을 품게 하소서. 주여 오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로우시면 사랑이 무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