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기도회

성서에 나타난 기도 / 김영운 목사 / 하늘나라의 왕자 / 안준호 목사 낭독

if i could 2023. 5. 9. 21:45

성서에 나타난 기도 / 김영운 목사 저

하늘나라의 왕자

안준호 목사 낭독 / 기독교대한감리회 참포도나무교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한 지경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는다. 무신론자도 정말 앞이 캄캄해지면 기도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솟아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어려움을 느끼면 기도를 하게 마련인가 보다. 더욱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을 때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한 두 번은 정말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현재의 생활을 청산하고 그야말로 일생을 건 기도를 하게 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 사람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는 자연히 과거를 돌이켜 보는 회상과 아울러 참회가 따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서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이 없어야 할 이 말이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기도는 삶 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부자들과 건강한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은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이 잘되고 평안할 때 사람들은 흔히 기도를 게을리 할 유혹에 빠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는 삶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기도다운 기도는 찾아볼 수 없게 되며, 설령 기도를 때때로 한다 하여도 거의 형식적인 기도밖에는 하지 않게 된다.

 

(각주 : 궁즉통이란 말이 있다. 궁하게 되면 통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려움을 겪기 전에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고난은 기도로 향하는 대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도시인들은 너무도 편해서 역설적으로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영적으로는 가난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니까 정말 기도가 필요할 때가 온다.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온 밤을 지새며 기도해야 할 때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 때에는 참된 기도에 필요한 시간과 장소를 찾고 착실하게 준비해서 홀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한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주저하거나 외면할 때에는 하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안 하고 쉬었던 때가 있었을망정, 일단 절실한 기도가 요청되고 그만큼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때에는 일생일대의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일생을 건 기도를 성서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야곱의 기도(창세기 32:22~33)는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특히 성서의 그렇게도 많은 부분이 한 인물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드물다.

 

이제 우리는 야곱의 일생일대의 기도를 전후한 그의 삶의 과정과 함께 야곱의 기도를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써 그로부터 기도에 대한 깊은 뜻을 찾아보자.

 

우리는 쌍둥이로 태어난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그의 형으로부터 장자의 상속권을 빼앗은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속임수를 써서 아버지로부터 축복까지 받은 야곱은 그러나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급하고 분별없는 기질 때문에 장자의 상속권을 어처구니 없이 빼앗긴데다가 동생을 편애하는 어머니와 짜고서 아버지를 속여 축복까지 받은 동생을 형 에서는 몹시 미워하였다. 그래서 아버지 상을 입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그 때 동생 야곱을 없애버리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것이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첫째 이유요, 또 하나는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이 가나안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그런 이유들 대문에 외삼촌 라반이 사는 빠딴아람으로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던 야곱은 루스라고 하는 마을 가까이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꿈에 야곱은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또 야훼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이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해 주셨던 축복의 약속을 그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래서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난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런 축복도 역시 그의 조상의 믿음 덕분이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이르러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해를 일꾼으로 살면서 라반의 큰 딸 레아까지 얻고 후일에 열 두 지파를 이룰 아들들을 낳았다. 그렇게 해서 20년을 라반의 집에서 살아온 야곱에게는 이제 주인이며 외삼촌인 라반과 그의 일족이 시기하고 두려워할 정도로 재산이 불어났다. 그러나 그처럼 아들을 많이 낳은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기 때문이요, 재산이 불어난 것도 하나님의 천사가 지시한 대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야곱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는다.

 

(각주 :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성실하게 살았던 야곱의 삶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참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평생 동안 살았던 성실한 삶에서부터 출발한다.)

 

드디어 야곱은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간다. 결국 야곱이 도망친 것을 사흘 후에야 안 라반은 일가친척을 총동원하여 야곱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악지대에서 야곱을 따라 잡았다. 다시 한번 결정적인 위기에 빠진 야곱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여기서도 야곱은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진실하심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다. 아직도 야곱에게서는 기도다운 기도를 발견할 수 없다. 최소한 성서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그렇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 때문에 자기를 잡으러 달려왔던 라반에게서도 축복을 받은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나 고향에 다가서면서 형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게 된다. 우선 머슴들을 형에게 보내어 문안을 드리게 하고, 동생인 야곱을 너그럽게 보아달라고 간청을 한다. 이와 함께 동정을 살피게 한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에서에게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며, 형이 이제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일은 벌어진 것이다. 20년 만에 만나는 동생을 환영 나온다고 해서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야곱은 덜컥 겁이 나고 걱정이 되어 일행과 양떼와 소떼와 낙타떼를 두 패로 나누었다. 에서가 한패에 달려들어 쳐 죽이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기도 드렸다”(창세기 32:7~9). 실로 오랜만의 기도이다. 어찌보면 20년만의 기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여기서도 역시 조상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뒤를 두고 기도를 한 것이다.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맡긴 기도는 하지 못했다. 자신의 빈틈 없는 계산과 준비성을 더 믿었던 것 같다. 형의 마음이 풀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선물을 보내 놓고 맨 나중에 가는 야곱에게서 철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기도보다는 오히려 간교하다고 할 정도의 지혜와 책략을 보게 된다. 이만큼 야곱은 아직도 정말 바르게 기도할 줄을 몰랐다.

(각주3 :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 또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만, 야곱은 이 때 전혀 다른 기도를 하게 되었다. 자신이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신의 전적도움을 의탁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는 그는 인간의 힘의 발원지라고 하는 환두뼈가 위골되었다. 결국 아무런 힘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바로 그 날 밤, 그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그들을 데리고 개울을 건넌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리고 야곱은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이제 모든 것을 손에서 떼어 보낸 야곱에게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야곱은 결코 영웅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의 특징이라면 부리런하고 빈틈 없는 계산과 준비성이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어느만큼 간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一代記)라고 해도 무방할 상당한 분량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그의 삶 속에서 기도와 찬양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런 만큼 그가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기까지는 정말 올바르게 기도할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야곱이 기도하면서 스스로 말했듯이 이 강을 건널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하나 밖에 없었던야곱이 큰 무리를 이루고 많은 재산을 모으는 동안 그는 너무 바빠서기도를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되어간다고 생각하니까 특별히 기도의 필요성을 안 느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신의 부지런함과 빠른 계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이라고 느껴지니까 기도를 안했는지도 모른다. 이렇던 야곱이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천사를 붙잡고는 놓아 줄 수 없다고 떼를 쓴 것이다.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이다.

 

람들은 흔히 모든 일이 잘될 때 흔히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장식품처럼 늘어 놓는다. 은연중에 자신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강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얍복 나루터 이전의 야곱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에게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야곱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을 보게 된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고 기도를 게을리 하던 야곱이 아니다. 웬만큼 급하게 느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기도하던 야곱이 아니다. 기도는 하면서도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마음이 앞서서 뒤를 두고 기도하던 야곱이 아니다. 기도를 하고서도 그 기도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야곱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뼈가 부러지도록 느낄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타내는 야곱이다.

 

얍복 나루터에서의 야곱은 자신이 하고 싶은 기도만하는 어제의 야곱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내어맡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하시지 않았는가?

 

모든 것을 다시 하나님의 발아래 굴복시키는 회개의 기도야말로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늘나라의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이요,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의 사람은 하늘나라의 왕자이다.

 

나가면서

야곱은 얍복강 나루의 기도를 통해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다만 그는 그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바꿨다. 자신을 바꾸기 까지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겨루었다. 하나님도 그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환두뼈를 쳐서 그의 힘을 빼셨다. 결국 야곱이 힘이 빠지자 하나님과의 싸움이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 그 기도는 야곱의 힘을 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가 가진 모든 생각과 판단과 기획을 내려놓게 되었고, 그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모두 이 이름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었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이란 뜻일 것이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는 자신을 바꿔야 할 때가 온다. 절체정명의 순간에 기적중의 기적은 다른 이들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손 두 발 들고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만이 나를 바꿀 수 있음을, 상황을 바꿀 수 있음을, 나를 구원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한 기도일 것이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는 남을 바꿀 수도, 상황을 바꿀 수도, 하나님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바꿀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야곱과 같이,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소서. 내 생각과 판단과 지식 그리고 경험을 내려놓고 오로지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소서. 주여 오늘 이 저녁 우리를 다루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