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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렇게 사시오?
    설교 2024. 12. 3. 16:00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렇게 사시오?
    18:33~38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나누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일산동지방회 목회자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이십년동안 목회를 하는 가운데 이렇게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아마도 세번째인듯 합니다. 십년 전 쯤인가요? 직전 월에 교역자회의를 마친 교회목사가 설교를 하던 방식에서 지금은 개최하는 교회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이렇게 하는 수 없이 설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목사로서 기쁘면서도 동시에 쉽지 않은 일임을 동역자 여러분들이 널리 해야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전통적인 의미에서 설교를 하거나 아니면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요즘은 사실 설교라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이 사이에서 설교하고 있네라는 말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관습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 새로운 실체가 온다면 그 실체에 적확하게 설명해 내는 언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설교자의 책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 설교 또한 그렇게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으시니, 제가 더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본문은 제가 지난 왕국주일에 교우들에게 설교를 했던 본문입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진리가 무엇이요?”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삶이 되자는 골자의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끝난 뒤에 뭔가 개운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어떤 곳을 탐방하러 여행을 떠났는데, 그 문 앞에서 사진만 찍고 정작 그 장소를 들어가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듯한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찜찜한 마음으로 커피트럭에서 일을 하는 가운데 문득 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음성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바로 빌라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제 설교는 말하자면 본디오빌라도가 던진 화두로 부터 시작한 셈입니다.

     

    본디오빌라도는 유대를 치리하기 위해서 파견된 로마의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지역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이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는 서로 다른 종교문화적 입장으로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지켜야 할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힘의 질서로 인해서 구축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힘의 균형은 깨지고 문제가 될 여지는 어디서든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소요로도 로마의 평화는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로마의 평화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사회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질적인 유대사회의 리더들이였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오히려 로마의 평화는 더욱 더 공고해졌습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본디오 빌라도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청년을 끌고 왔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고소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스스로를 유대의 왕이라고 지칭하고 제자들과 함께 다닌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전형적으로 정치범으로 고소를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였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결정에 가까웠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자신들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쉽게 생각을 하고 예수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꼬여버렸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요?” 그의 질문은 무척이나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스스로가 자신을 왕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들떠서 그렇소, 내가 유대의 왕이요!”라고 대답할 법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부터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지금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고 있는데, 오히려 심문을 받는 사람이 도리어 심문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빌라도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지,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허점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첫 번째 심문이 실패로 돌아가자, 빌라도는 예수님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다시 심문을 이어갑니다. 그는 이번에는 예수가 한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매우 빈궁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해서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만일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당신의 부하들이 싸워서, 예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임을 말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빌라도가 가졌던 짜증스러운 마음이 제일 먼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과의 이런 대화는 그에게는 무척이나 지루한 것이며 또 짜증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빌라도가 가진 짜증스러운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을 깊이 듣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을 꼬투리 잡아서 그를 기소할 생각만 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예수님에게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소 나는 왕이오!”라고 말하면 빌라도는 예수의 말을 증거로 내세워서 형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유도심문에 걸린 듯하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이렇게 다시 물어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그리고 그는 이제 유대 사람들에게로 가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이 말씀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이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빌라도의 말에 대해서 나는 왕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빌라도의 유도심문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맥락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빌라도가 말한 맥락이 다른 것은 빌라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라고 말한 것이 어떤 맥락인지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분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죄없으신 가운데 고통을 당하신 것을 공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빌라도가 한 말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분이 죄가 없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누명을 쓰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구명하려고 들지 않고 사람들이 놓은 덫 안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안타까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죄인을 풀어주는 관습을 들어서 예수님을 놓아줄 것을 오히려 제안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마지막 질문,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물어본 말이, 다른 말로 들렸습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사는거요?”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매번 예배 때 마다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지금도 예배 시간마다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원흉과도 같은 사람으로 불려지니 개인에게는 안 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그가 결국 자살을 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또 다른 전승에서는 그가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곱트교회와 아비시니아 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기까지도 한다니까, 우리가 가진 생각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빌라도와의 대화를 통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는 사실은 예수님은 당신이 마땅히 피할 수 있었던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와 그리고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로마의 평화 앞에서 침묵하며 암묵적으로 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이루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이 그 진리를 위해서 태어났고, 이 세상에 왔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서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전승과 같이 빌라도가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저는 이 부분이 그를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그 사랑 말입니다.

     

    사랑하는 일산동지방 교역자 여러분, 저는 한국교회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말을 잘하는 이들, 설교를 잘하는 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자신이 붙든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복음은 후대에도 전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소?”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 달에 일산동지방 목회자분들과 종교개혁탐방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깊은 여운이 남는 인상깊은 여정이었습니다. 귀한 행사를 주관하고 수고한 지방임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장소는 바로 루터의 목사관이었습니다. 그곳에 루터의 아내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녀는 다소 퉁명한 얼굴로 바쁘게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서 살아야 했던 루터와 그녀의 아내의 삶은 고단했을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일 때, 카타리나 폰 보라는 그들의 먹거리를 하느라고 허리가 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로 인해서 밤마다 두 사람이 심하게 다퉜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를 여섯 명이나 낳고, 또 두 사람의 삶으로 통해서 종교개혁의 역사가 열렸다는 것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지금처럼 결실을 맺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감히 따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교회가 부흥하는 일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모두 들으시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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