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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의 기도 / 김영운 목사 / 낭독과 해설 : 안준호 목사낭독기도회 2023. 6. 7. 19:43
세리의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 (김영운 목사) / 낭독과 해설 안준호 목사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흔히 세리의 기도라고 알려진 이 기도는 실상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누가 18:9~14)를 말씀하시면서 세리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예를 드신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도를 한 세리가 있었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 기도는 다름 아닌 바로 예수 자신의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 기도가 세리의 기도이든 예수의 기도이든 간에 그 타이틀이 문제가 아니라, 이 기도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얻을 수 있느냐 하는데 관심을 두게 된다.
성서 전체에 나타난 수많은 기도들 가운데서 바로 이 기도처럼 짧은 한 마디의 기도가 그렇게도 많은 말로 하는 다른 기도들보다 더 핵심적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담은 기도의 본이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참된 기도”라는 말을 하기가 참 거북하다. 왜냐하면 기도는 본래 참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도 그 자체가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참되지 않은 기도가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너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된 기도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같은 참되지 않은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오랜 전통과 수많은 성인(聖人)들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 일명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 그 깊은 뜻을 되새겨 보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서 본문(누가 18:13)에 있는 기도는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 기도”는 같은 내용이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기도”라고 한다. 다만 자비를 구하는 것은 같다. 예수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요한 14:6)이요,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알 수도 있도 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요한 14: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항이 우리에게 나타났기(요한14:9)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 기도”는 성서 자체의 역사만큼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에는 성서가 우리에게 전달된 과정보다 더 험한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날 성서를 일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 기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하는 “예수 기도”는 최소한 6세기 경부터 사용되러 왔다. 그것은 시내산에 있는 성 카테리나 수도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다만 그 전에는 어떻게 사용되었고 또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시내산의 그레고리가 마케도니아에 있는 아토스산으로 여행을 하여 거기에서 이 예수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이로부터 아토스산이 “예수 기도”의 본격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여러 세기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기도”를 하였으며 이 기도를 하면서 얻은 체험과 명상 등을 글로 남겨 오늘까지 전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글을 모아서 엮어낸 것을 이른바 “필로칼리아”(Philokalia)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필로칼리아”를 통하여 “예수 기도”의 깊은 뜻을 되새기게 되었다.
“예수 기도”를 일명 “마음의 기도”라고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을 보면, 우선 “예수 기도”는 모든 기도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입술로 기도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해야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인격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한다느 것은“전인격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 기도”를 “마음의 기도”라고도 한다.
마음의 기도, 곧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의식(意識)”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도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늘 하나님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게 되면, 나아가서는 성(聖)요한 크리소스톰이 말하였듯이 “우리가 어디 있든지 기도로써 우리는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을 수 있다.”
“예수 기도”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러나 때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도 있으며, 그 뒤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여”하는 말을 생략하고 더 짧게도 한다. 더 짧게 할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는 기도만 할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든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는 기도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기도는 전세계적으로 예전(禮典) 가운데 나타나는데, 때로는 세 번, 때로는 아홉 번, 심지어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예전 속에서는 마흔 번 되풀이되기도한다. “예수기도”의 가장 간다한 형식은 다만 “예수님”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예수 기도”라 하면, 여러 가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에 소개한 것을 두고 일컫는 것이다.
“예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하는 것과, 둘째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중에서 둘째 부분이 더 오래 된 것이다. 성서 본문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중에서 둘째 부분이 더 오래 된 것이다. 성서 본문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기도는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상에서 불리어지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기도였다.
“자비를 구하는 기도는 사랑과 친절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모든 기도 속에 담겨져 있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외치는 기도요, 애굽의 종살이 가운데서 외치는 시음과 절규의 기도요, 오랫동안 광야를 헤맬 때 부르짖던 고통 속의 기도이다.
마음을 향하여 인가의 마음을 여는 기도이다. 맹인 바디 매오(마가 10:47)가 이 기도를 하였고, 귀신들린 딸 때문에 괴로와하던 가나안 여인이(마태15:22) 이 기도를 하였고, 나병환자 열 사람이 (누가 17:13) 이 기도를 하였다.
누구보다도, 보통 기도를 하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절박한 상황에 있던 이 사람들이지만, 구구하게 긴 말을 늘어놓지 않고 그들은 바로 자비를 구하는 이 기도를 하였다.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기도는 가장 근원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구하는 기도도 아니요,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니요, 능력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변화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더우기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기도이다. 이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요. 그분의 마음을 향한 기도일 뿐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는 사람은 그 밖의 어떤 무엇도 바랄 것이 없음은 암시하는 기도이다. 시편 73:25의 말씀이 뜻하는 바와 같은 부르짖음이다.
"하늘에 가도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사옵고 땅에서도 당신만 계셔주시면 그에게 무엇을 더 바라리이까 ?
물론 우리가 다른 기도도 할 수는 있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역시 자비를 구하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접하게 되어 자비를 구하는 기도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중보(仲保)와 찬미와 탄원 등의 모든 기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의 죄와 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비를 구할 뿐 아니라, 이웃의 죄를 인식하기 때문에 중보자가 되어 자비를 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와 찬미가 이미 자비를 구하는 탄원의 기도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기도를 예수님께 하는 것이다,
“예수기도”의 처음 부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은 예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한 그리스도교 원리의 핵심이며, 최초의 기본적인 그리스도 고백이다. 이는 처음 교회의 신앙고백이었을 뿐아니라, 영원한 신앙고백이다,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신앙의 내용이 모두 담겨져 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신 분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때 이미 우히는 모든 것을 그의 발 앞에 굴복시키고 내어맡기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여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생각을 제쳐놓고 그분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기를 겸손하게 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기도“는 근원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기도를 늘 해야겠다. 쉬지 않고 계속해야겠다. 그러나 번잡한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문자 그대로 늘 기도할 수 있을까? 여기에 "필로칼리아"가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 기도"는 아주 짧으면서도 근원적인 완전한 기도이 다. "예수 기도"를 되풀이하노라면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입술에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차츰 계속하는 동안 이 기도는 우리의 호흡과 심장의 맥박에 실린다. 걸을 때에는 우리의 걸음걸이에 ”예수 기도"를 싣는다. 이 기도는 점점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한 부분이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은 곧 예수의 마음과 만나고 교제한다. 그래서 "예수 기도"는 자동적으로 마음에서 우려 나오는 기도가 되고, 언제 어디서나 이 짧은 기도를 함으로써 그리스도 생각으로 채워진다. "예수기도“의 뜻이 마음에 새겨지고 따라서 "그리스도 의식(意識)" 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예수 기도"를 계속하노라면 우리의 영적인 삶에 깊이가 더해지고, 그리스도와의 사귐 (Koinonia)을 더욱 긴밀하게 하여 줄 것이며, 우리가 일하고 배우고 놀고 예배하며 봉사하는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우리도 이제 세리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 기도"를 하여야 하겠다. 그것도 쉬지 않고 늘!
"주 예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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