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되게 기도할 권리낭독기도회 2023. 5. 17. 13:11
성서에 나타난 기도 / 김영운 목사 저
참되게 기도할 권리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
신앙은 불가능을 결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친다. 그래서 신앙은 불가능을 이겨내고, 불가능을 딛고선다. 그러기에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화시킨다. 그러고 보면 신앙은 어려움과 위험을 이기는 것이다.
각주 1)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목회를 했던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impossible possibility’로 설명했다. ‘불가능한 가능성’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서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불가능한 일들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흔히 기도로 나타난다. 믿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특히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대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 하겠으나, 위기 속에서의 기도는 더욱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곧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며 믿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흔히 가능한 것을 추구한다면, 똑같은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불가능을 직면하고 그것에 도전하면서 끝내 그것을 극복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은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써 믿음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기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표현하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믿음이 솟구치는 것처럼 위기 속에서 기도가 솟아나온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새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기도는 오히려 포로로 갇힌 속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있듯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하는 기도는 유일한 예배가 된다는 말의 뜻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도의 예는, 최근에 알려진 이야기로서 중공 치하의 어느 기독교 신자가 진흙으로 빚은 빵을 놓고 믿음의 형제들과 성찬 예배를 드린 것을 비롯하여 순교자들의 수많은 기도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절실한 기도와 그리고 절박한 기도의 상황을 우리는 예레미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구약에 나타난 예언자 예레미야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하였던가를 살펴봄으로써 절박한 상황 속에서 올릴 수 있는 기도를 배우자.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산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어떤 상황 속에서 그 땅을 샀었는가 하는 이야기 때문에 더욱 유명할 수밖에 없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이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면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상식이라는 울타리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따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는 정말 상식 밖의 행동을 한 것이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산 때는 유다 왕 시드기야 10년으로서, 그는 야훼의 말씀을 빙자하여 국가 안보에 역행하는 발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었다. 물론 전쟁이 벌어지고 포위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패망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패망의 문전에서 오히려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어도 모자람이 있을 터인데 도리어 함락과 항복을 예언하였으니 그는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도대체 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항복을 하게 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 갈 것을 예언하였던가? 그러면서도 자신은 어떻게 적군의 수중에 들어간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던가? 여기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그가 밭을 사고 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찾게 된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주변 사정이 어떻고 환경의 모든 조건들이 어떻든 간에 말씀위에 서서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답게 비판하고 예언하고 행동하였다.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바벨론군과 싸워도 소용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신 법을 따라 살지 않고, 무엇 하나 분부하신 대로 한 일이 없었던”(예레미야 32:23) 자들은 싸우기 전에 이미 패망을 그들 스스로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점을 알고 있던 예레미야가 어찌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진실을 아는 사람은 진실을 배반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야훼의 말씀은 진실 그 자체보다도 진실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은 세상이 뭐라고 해도 그 말씀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산 기도이다. 다만 이 것을 말로 옮겼을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확인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흔히 사람들이 안이하게 바라는 이른바 “희망적인 생각”(wishful thinking)과는 정반대의 경우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그러나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사는 사람의 예언(豫言)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절망적일 수는 없다. 비록 예언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안겨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최후를 뜻하지는 않는다. 아프고 쓰린 예언 저 뒤에는 희망과 약속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현실 비판을 냉혹하게 하지만, 믿음 위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며 예언을 한다. 여기에 복음이 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한 것이 그야말로 희망도 약속도 없는 마지막이었다면, 그는 밭을 사지 말았어야 한다. 더군다나 사회의 혼란을 틈탄 투기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다만 예루살렘이 패망할 것을 알면서도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밭을 샀다. 그것도 제 값을 다 주고 샀을 분 아니라, 문서를 만들고 돈을 치르어 주는 등 빈틈 없는 처리를 하였다(평화시도 아닌 전시에 이렇게 빈틈 없는 처리를 하면서 예레미야가 밭을 산 기록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부동산 거래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는 것도 자못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냉혹한 현실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밭을 산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훼께 기도를 올렸다. 예레미야는 이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기도를 올리지만 먼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잊지 않는다. 먼저 천지를 창조하신 데 대한 찬양을 드리고 전능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섭리를 찬양하면서 출애굽역사를 회상하고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셨던 축복의 섭리를 찬양한다. 패망의 순간에 적군을 목전에 두고 하는 기도로서 이렇게도 여유있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자못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기도는 처절하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깡그리 무시하고 산 백성의 죄를 참회한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재앙이 닥쳤다고 절규한다. 패망이 다가왔다. “보시다시피 주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던대로 재앙이 닥친 것을 본 사람만이 패망의 순간에도 밭을 사라고 하시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고 하신 아나돗의 밭을 사놓고 예레미야는 외쳤다 : “이렇게 이 성이 바벨론군 손에 떨어져 가는데 주 야훼께서는 저더러 증인들을 세우고 돈을 주고 그 밭을 사라고 하시니,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그러나 이런 절규 속에서 이미 희망과 약속의 가느다란 소리는 들려나오기 시작한다.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하는 말 속에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고 뜻을 깊이 깨달을 수는 없어도 그분의 분부는 지키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32:17, 27)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명령하시는 뜻은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선 그 명령을 따르겠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때문에 현재에는 패망하여도 못하실 일이 없으신 주께서 “아나돗”에 사놓은 땅을 “쑥밭이 되어 사람이나 짐승의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게”하시지는 않을 것을 믿은 것이다. 이것은 곧 복구에 대한 희망과 약속이 되는 것이다.바로 이와 같은 희망을 지녔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밭을 샀다. 그것도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살 권리가 있다”고 하시는 야훼의 말씀을 따라 그 밭을 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산 것은 패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고 희망과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을 기도로 나타냈던 것이며, 이는 곧 입으로 하는 기도 이전의 기도, 행동으로 하는 기도였다.
야훼의 말씀대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을 보는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현실 비판을 하면서 예언은 하지만 희망과 약속을 무시하는 예언자들(32:43 참조)은 결단코 누릴 수 없는 권리였다.
그러나 누가 이런 권리를 지니는가? 예레미야도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하고 외치지 않았던가? 다만 진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앞을 내다본다. 신앙이 환상을 보게 만드는 사람, 고난을 감당할 태도를 갖추게 만드는 사람, 그래서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를 이루게 만드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살 권리”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말로 하는) 이전의 기도(행동으로 하는)를 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되게 기도할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만이 구속(救贖)의 역사는 비극과 고난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진리를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를 생각하다
불가능한 가능성
신앙은 가능의 세계 만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가능성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 힘도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다만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기도의 시작, 믿음의 시작입니다.
아나돗의 땅을 사라!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예루살렘은 포위를 당했습니다. 아나돗은 이미 바벨론의 손에 넘어 갔습니다. 그 가운데 거짓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이 함락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기에 그는 바벨론에게 함락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예언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은 아나돗의 땅을 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 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아나돗’의 땅을 사게 됩니다. 그것도 정식 절차를 다 밟아서 구매를 완료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그 가운데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 행동하는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는 기도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습니다. 금전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아나돗의 땅을 구매’하는 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땅을 산 행동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리게 되는 희망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내 생각과 경험으로 제한하지 않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리고 그 말씀을 신뢰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아나돗의 밭을 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둠이 내린 골목과 길목공소, 말씀에 순종하여 한 발자욱 한 발자욱 걷고 있습니다. '낭독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웃과 함께 하는 기도 / 성서에 나타난 기도 (김영운 목사) / 낭독 및 해설 : 안준호 목사 (참포도나무교회) (0) 2023.06.21 성령과 함께 하는 기도 (0) 2023.06.14 세리의 기도 / 김영운 목사 / 낭독과 해설 : 안준호 목사 (0) 2023.06.07 요나의 기도 (0) 2023.05.31 성서에 나타난 기도 / 김영운 목사 / 하늘나라의 왕자 / 안준호 목사 낭독 (0) 2023.05.09